조혜정 ㅣ <한겨레> 사회정책팀장
2006년 가을 민주노동당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출입하자마자 하필이면 당 전·현직 간부가 간첩 혐의로 구속되는 ‘일심회 사건’이 터졌고 당은 정파 갈등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대학 때 학생운동과 별 인연이 없었던 나는 누가 어느 정파에 속하는지,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를 파악하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그냥 하나의 진보정당이라고 생각했던 민주노동당 안의 이념 스펙트럼은 다양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같은 당 안에서 하는 해석인데도, 크게 자주파(NL)와 평등파(PD)로 나뉘어 대립하는 정파들의 간극은 보수정당과의 간극보다도 더 멀었다. 뒤이은 대선과 분당, 진보신당 창당, 통합진보당 창당과 해체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이념 또는 신념이 독선과 교조주의의 모습을 띠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 공동의 적(안이든 밖이든)과 대항할 땐 그 이념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구나 싶어 씁쓸했다.
10년도 훨씬 넘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준 건 민주노총이다. 코로나19로 위기에 빠진 노동자들을 위해 시급히 대책을 마련하자며,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참여할 수 없는 자신들의 사정을 참작해달라고 요구해 출범한 노사정 대표자 회의를 두고 민주노총이 내분에 빠졌다. 어떤 사람은 잠정합의안에 해고 금지와 비정규직 대책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회적 대화에 반대하는 여러 정파가 몇달 뒤 치러질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본색을 드러냈다고 풀이한다. 어느 쪽이든 진실의 일말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눈길이 간 곳은, 지난 2일 민주노총 최대 정파라는 ‘민주노동자전국회의’가 낸 성명의 마지막 대목이다. 노사정 잠정합의안 폐기를 요구한 이 성명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합의문을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코로나로 위축된 현장 조합원의 목소리를 결집하고 투쟁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논란을 끝내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 조직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대화보다 “투쟁 조직화에 총력”을 기울여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민주노총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는 세력이 오랜 기간 집권했고, 민주정부에서도 친노동 정책을 그리 적극적으로 추진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익은 별로 없어 보인다. 조직력이 떨어지면서 ‘뻥파업’이라는 조롱이 나올 정도로 투쟁은 조직하기가 어렵다. 여론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것도 아니다. 대정부 요구사항을 관철하기도 쉽지 않다. 외려, 지난 두어 해를 돌이켜보면 대화에 참여했더라면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 더 많다.
대표적인 게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다. 민주노총이 참여하지 않은 경사노위에선 지난해 2월 현행 최장 3개월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6개월로 확대하는 내용의 합의안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장시간 노동을 계속하자는 거냐며 총파업까지 벌였다. 경사노위 본위원회 계층별 대표 3명이 끝까지 반대해 이 안은 최종 합의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핵심 내용은 더불어민주당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에 다 담겨 다시 국회 논의를 앞두고 있다. 그 내용의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부터 민주노총이 참여했어도 같은 결과였을까?
지난해 가을엔 현재 노사정 잠정합의안에 반대하는 산별 조직인 공공운수노조가 경사노위에 새로 구성된 공공기관위원회에 ‘참관’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공무원 보수체계 개편이 일방적으로 이뤄져선 안 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는데, 참관이든 뭐든 경사노위는 안 된다는 다른 조직들의 반대에 가로막혔다. 보수체계 개편 논의에선 직무급제가 빠질 수 없는데, 공식 논의기구에 참여하지 않은 민주노총이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이번 노사정 잠정합의문이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이라지만, 큰 틀에서 서로 양보하고 협력할 수 있는 정도를 정해놓는다면 후속 논의를 구체적으로 해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역·산별 조직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고 김명환 위원장은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의미 없는 분열 말고, 울림 없는 파업 말고, 민주노총에 남은 선택지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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