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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세화 칼럼]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등록 2020-06-25 17:20수정 2020-06-26 02:38

늘 한국의 진보세력은 그 대부분이 이념이든 상상력이든 진영 속에 묻은 채 검찰과 언론 한두 곳을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윤석열 검찰총장이 물러나기라도 하면 진보세력의 할 일이 거의 끝날 듯한 놀라운 시절 아닌가.

이명박-박근혜의 보수정권에 대비하려고 문재인 정권을 ‘진보정권’이라고 부르게 된 듯한데, 4·15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뒤에는 더 폭넓게 부르고 있다. 1958년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법살한 뒤, 진보는 국가보안법 아래 빨갱이의 언어로 오랫동안 금기시되다시피 했는데, 마침내 진보정권이 성립되었고 장기집권까지 전망되고 있다니 나름 진보 이념을 껴안고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나로선 감개무량할 수 있겠다. 그런데 노무현 정권 당시에는 그래도 살아 꿈틀대던 국가보안법 폐지나 국공립대 통합 네트워크화 요구의 움직임은 잘 보이지 않고,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검찰개혁,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비해 거의 들리지 않는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는데,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미리 말하지만, 진보 이념과 진보정권(정치)의 현실 사이의 괴리가 문재인 정권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령 한국 언론은 <21세기 자본>에 이어 최근 한국에서 출간된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를 크게 소개했지만,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를 넘어서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에 기반한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그의 이념을 한국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모색하는 정치 역량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워낙 그런 역량이 없지 않으냐고? 일면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한겨레>처럼 진보를 표방한 언론이라면 다음의 구체적 실천 과정에 개입하고 담지할 정치사회 역량을 키우고 고무하기 위한 고민과 노력, 실천이 있어야 마땅하다. 즉, “이것은 특히 사회적 일시소유체제 확립을 경유하는데 이 체제는 한편으로는 기업 내 임금노동자들과의 의결권 및 권력 분유와 그 상한 설정에,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누진소유세와 보편적 자본지원과 재화의 지속적인 순환에 기초한다. 또한 이것은 누진소득세 및 탄소 배출의 집단적 규제로 이루어진 체계를 내포하는데, 이 체계를 통해 사회보장-기본소득-생태주의적 이행-실질적인 평등주의 교육권의 시행을 위한 재원을 조달할 수 있다.”

오늘날 더욱 격심해지는 불평등주의 체제의 극복이 진보(정치)의 핵심 과제라면, 피케티가 적시한 임금노동자의 의결권 및 권력 분유, 강력한 누진소유세, 기본소득을 넘어선 보편적 자본지원, 탄소 배출의 집단적 규제, 실질적인 평등주의 교육권 등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은 하나도 없다.

지난 6월23일 경실련은 기자회견을 열어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서울 아파트값이 올라 493조원의 불로소득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서울 아파트 중위값이 이명박 집권기엔 3% 하락했고 박근혜 정부 시기엔 29% 상승했던 것에 비해,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52% 올라 불로소득 불평등 격차가 보수정권 때보다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울 아파트 가격이 치솟은 원인에 대해 경실련은 문재인 정권이 “집권 초부터 부동산 투기를 조장한” 반면, “공시지가를 현실화하지 않고 분양가 상한제 도입을 주저했으며 부동산 부자들에게 감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권이 가장 뼈아프게 들어야 할 부분은 소득 3분위 가구(5분위별 가처분소득 기준)가 서울 중위가격 아파트를 사는 데 걸리는 기간에 관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기에는 그 기간이 16년에서 13년으로 줄었고 박근혜 정부 집권기에는 13년에서 15년으로 늘어났을 뿐인데, 문재인 정부는 임기 초에 16년이었는데 지금은 22년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진보정권 아래 이렇게 부동산값이 치솟은 것을 “브라만 좌파(학력 엘리트)와 상인 우파의 공모”의 구체적 예로 언급할 수 있을 듯하다.

1990년을 전후하여 현실사회주의권이 무너진 뒤,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치세력(브라만 좌파)은 노동계급에겐 등을 돌리고 세계화에 올라타는 길을 택했다. 이념적으로 왼편에서 끌어당기는 외부 동력이 사라진 터에 우경화는 일국 단위 대의제의 표밭이 넓어진다는 점에서 집권전략의 일환이었고 실제로 주효했다. 영국 노동당은 신노동당(토니 블레어)을, 독일 사민당은 신중도(게르하르트 슈뢰더)를, 프랑스 사회당은 사회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는데, 이런 우경화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또는 학력 엘리트답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정체성 정치를 추구하였다. 녹색 가치가 강조되고 페미니즘 논의가 활발해졌다. 서유럽 성소수자들에게 1990년대 프랑스의 사회연대계약(PACS) 등 생활동반자법을 거친 뒤 2001년 네덜란드의 동성결혼권과 함께 21세기가 ‘해방의 세기’로 열리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이다.

최근 수원 영광제일교회 이동환 목사가 교회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해 8월31일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들에게 꽃잎을 뿌리며 축복했다는 게 이유다.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소속 차별금지법 제정연대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조속 제정 촉구를 위한 오체투지를 했다.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뿐만 아니라 ‘경제적 차별’까지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의 성안을 마치고 공동발의자를 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올해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진보정권의 여당 국회의원들한테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19대 국회에서 민주당의 김한길·최원식 전 의원이 발의했던 차별금지법 법안을 자진 철회했던 일, 문재인 대통령 후보 시절, 성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려 울려 퍼졌던 “나중에!”의 외침 소리, 그리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김진표 의원 등이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노골적으로 밝혔던 일뿐이다.

안타깝고 분하게도 남북관계가 파탄 난 지금, 문재인 정권에게 진보는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노동 존중이 있지 않으냐고 할 사람이 있겠다. 그렇다, 문재인 정권에서 노동은 ‘1’순위다. 다만 기업이 ‘0’순위인 한에서 1순위다. 코로나19 사태에 문재인 정권은 “기업을 반드시 지키겠다”며 긴급자금 100조원 투입을 결정했던 반면, 이 유행성 질병이 확산되는 동안 노동자들에게 직접 휴업수당을 지급하고 해고를 금지하라는 노동계의 요구는 묵살했다.

오늘 한국의 진보세력은 그 대부분이 이념이든 상상력이든 진영 속에 묻은 채 검찰과 언론 한두 곳을 정조준하고 있다. 만약 윤석열 검찰총장이 물러나기라도 하면 진보세력의 할 일이 거의 끝날 듯한 놀라운 시절 아닌가.

홍세화 ㅣ 장발장은행장·‘소박한 자유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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