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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청년고용 공정성을 훼손하는 정규직화?

등록 2020-06-16 17:24수정 2020-06-17 09:30

외국 잡지에 실린 삽화의 패러디가 생각난다.
자본가·노동자·비정규직이 20개의 과자를 놓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자본가는 19개의 과자를 가져가면서 노동자에게 경고했다. “조심해, 저 비정규직이 네 과자를 가져갈지도 몰라!”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면서 상급 단체를 금속노조로 선택했다. 노조 설립을 준비하면서 살펴보니 금속노조가 가장 활발해 보였고 선배 활동가들도 “노조는 ‘금속’이지!”라고 잘라 말하더란다. 노조 위원장은 “굳이 따지자면 우리 회사도 제품을 만드는 기계는 ‘금속’이야”라며 애써 금속노조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노조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첫번째 사업으로 선택했다. 정규직으로만 구성된 노조가 그렇게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사업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조는 금속이지!”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표현이다.

노동조합을 상대해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경영진이 어리숙한 탓이었는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의외로 쉽게 타결됐다. 100명이 훨씬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됐고 대부분 노조에 가입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회사 경영진이 ‘노조 파괴범’으로 악명 높은 경영 자문 회사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시작했을 때, 첫번째로 사용한 ‘카드’는 “노조에서 탈퇴하면 성과급과 승진에 특혜를 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비정규직이었던 조합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천신만고 끝에 노조를 설립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정규직 조합원들 중에서는 탈퇴자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노조 집행부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빚어진 이유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 없이 정규직화를 선물로 너무 쉽게 받은 탓이라고 분석했다.

노조 간부들은 대부분 해고됐다. 3년이 넘도록 복직 투쟁을 이어가면서 위원장은 “금속노조에 가입하기를 백번 잘했다. 우리가 납부한 조합비의 수백배도 더 되는 금액을 그동안 금속노조에서 해고 노동자 생활비와 투쟁기금으로 지원받았다. 우리는 금속노조에 가입해 가장 많은 혜택을 받은 조직이다”라고 자랑을 하곤 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전체 직원 중 84.2%가 비정규직이어서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천국’이라고 불리던 인천공항에 찾아가 “임기 내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한 이래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잠시 박차를 가하는 듯 보였다.

대통령의 약속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마무리지은 공공기관의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우리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이미 끝냈다”고 답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 산하 공공기관 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자회사 정규직은 무늬뿐인 정규직이다. 본사가 자회사와 계약을 종료하면 자동적으로 해고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는 조직들이 많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꾸준히 실현해온 공공기관이 있다. 1단계로 기간제 노동자 50여명을 직접고용 정규직화했고, 그다음 해에 2단계로 미화·경비·시설·운전 등 파견용역 노동자 700여명을 직접고용 정규직화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의 투쟁 없이 정규직 노동조합의 교섭력으로 쟁취한 성과들이었다. 3단계로 추진 중이던 고객센터 비정규직 1600여명의 정규직화가 최근 벽에 부닥쳤다. 젊은 정규직 조합원들이 대부분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집행부가 갈등 해소를 위해 수십회에 걸쳐 ‘현장숙의단’ 토론회와 전체 조합원 교육을 진행하며 비정규직 직접고용 정규직화의 당위성을 설명했지만 조합원 교육장에서는 발언 신청자들이 줄을 이어 대기했고 거의 같은 내용으로 집행부를 야유하는 발언이 나올 때마다 젊은 정규직 직원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교육장이 떠나갈 정도로 울려 퍼졌다. 급기야 직접고용 정규직화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이어졌고 보수 언론들은 “민주노총을 등에 업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청년 채용의 공정성을 훼손한다”고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민주노조라면 집행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전체 조합원의 뜻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젊은 직원들의 명분이었다. 설문조사 형태로 의견 수렴을 해보니 전체 조합원의 90%가 현재와 같은 방식의 비정규직 정규직화 사업은 중단해야 한다고 답했다. 노조 집행부는 하는 수 없이 비정규직 당사자의 주체적 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직접고용을 추진하는 사업의 중단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 잡지에 실린 삽화의 패러디가 생각난다. 자본가·노동자·비정규직이 20개의 과자를 놓고 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자본가는 19개의 과자를 가져가면서 노동자에게 경고했다. “조심해, 저 비정규직이 네 과자를 가져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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