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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숨 쉴 수 없어요” / 손아람

등록 2020-06-10 16:27수정 2020-06-11 09:39

손아람 ㅣ 작가

“숨 쉴 수 없어요.” 경찰의 무릎에 목이 짓눌린 8분46초 동안 흑인 남성은 16번을 애원했다. 결국 영원히 숨 쉬지 못했다. 그 죽음으로 미국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막을 내렸고, 차별의 팬데믹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을 휩쓸었다. “숨 쉴 수 없다”는 유언은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를 대신하는 시위 구호로 자리 잡았다.

경관 네명이 우발적 살인에 해당하는 2급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반면 유족과 시위대는 의도적 살인죄인 1급 살인죄를 원하고 있다. ‘흑인이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흑인이라서 살해당했다’는 주장 사이를 사법 체계의 엄격함이 가로막고 있다. 경관 중 두명이 소수인종이라는 사실은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든다. 피의자 측 변호사들은 그 혼란함을 전략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변호사 한명이 방송에 나와 속내를 드러냈다. “이걸 인종차별로 몰고 가려고요? 경관 네명 중 한명은 흑인이고 한명은 동양인이었는데요?”

피해자가 흑인이라서 죽었다는 주장은 입증의 난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흑인이라서 죽은 게 아니라면(혹은 법원이 살인의 고의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미국 사회의 격렬한 반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분노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 상황의 복잡함은 잘못된 결론으로 이어지기 쉽다. 피해자의 인종은 우연일 뿐이며 얼마든지 백인이 될 수도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회가 백인의 죽음보다 흑인의 죽음에 더 예민한 이유를 묻게 된다. 이들은 똑같은 비극에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거꾸로 탓하면서 해시태그를 붙여 쓰고 있다. “백인의 목숨도 중요하다.”(White lives matter)

꽤 익숙한 풍경이 아닌가? 최근 서울역에서 길을 걷던 여성이 남성의 주먹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된 사건을 보도한 언론의 논조는 ‘묻지마 범죄’와 ‘여성혐오 범죄’로 갈렸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당시에는 좁힐 수 없을 만큼 간극이 벌어졌었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든 여성들이 강남역을 메우고 있을 때,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남자라서 죽은’ 사건을 열거하는 남성들이 넘쳐났다. 이를테면 고유정의 살인 범죄가 ‘남성혐오 범죄’로 분류되지 않는 게 그들의 불만이다. 사회의 비대칭보다 목소리의 비대칭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차별과 악행은 어떻게 다를까? 한국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영상을 들여다보자. 북적거리는 호주의 밤거리, 백인 여성이 “바이러스를 옮기지 말라”면서 한국 남성을 폭행한다. 그런데 피해 남성에게는 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일반적으로 드러내는 공포의 감정이 읽히지 않는다. 그는 기가 찬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린다. 교차하는 두 개의 권력 그물 사이에 얽힌 상황의 아이러니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폭행 가해자가 키가 한뼘쯤 작은 신체적 약자라는 사실, 자신이 반격할 수 없는 사회적 열세에 놓여 있다는 사실, 가해자의 주먹에도 같은 확신이 실려 있다는 사실, 만에 하나라도 반격한다면 가혹한 시스템의 보복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즉각 이해했던 것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동영상 속에서 여성의 주먹이 안면을 강타할 때마다 터져 나오는 백인 남성들의 환호성으로 충분히 암시되었다. 그중 어느 것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는 악행이 아닌 차별을 호소하는 쪽을 택했다. 핵주먹을 장착한 성격 더러운 여성에게 당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가해자를 ‘여성’이 아닌 ‘백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구조는 분위기를 이룬다. 차별에 대한 분노 역시 분위기에 반응하는 분노에 가깝다. 이 감정은 개별적인 폭력이 아니라, 약자를 항거불능 상태로 몰아넣고 강자를 악의 길로 유혹하는 사회를 향한다. 하지만 분위기는 공기와 같아서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은 “숨 쉴 수 없다”는 외침을 끝내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숨 쉴 수 없다고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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