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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상헌, 바깥길] “경제 방면의 책”을 읽다

등록 2020-06-09 14:17수정 2020-09-01 16:12

‘이번엔 다르다’고?…그래서, 돈은 누구를 위해 어디로 가는가

이번에도 ‘이번에는’이라는 말이 넘친다. 기억이 힘이라면, ‘이번에는’은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을 것이라 의심해야 할 일이다. ‘뉴노멀’도 지난 경제위기에 나왔던 새롭지 않은 수사다. 저번의 ‘뉴노멀’도 이루지 못했으니 ‘노멀’이 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선택적으로 문학적인 ‘경제 방면의 책’보다 찌질한 살림살이를 살피는 ‘문학 책’을 읽는다.

“요즈음은 문학 책보다 경제 방면의 책을 훨씬 더 많이 읽게 된다. 그래야만 사회에 대한 무슨 속죄라도 되는 것 같고 저으기 흐뭇한 마음이 든다.” 시인 김수영의 ‘밀물’이라는 산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시 몇 줄로는 돈푼 제대로 벌지 못하는 자신의 ‘비경제적’ 삶이 경제서적 독서를 통해 위로받는다는 묘책을 말하는 것일 테다. 아내 성화에 집을 고치려는데, 건축 허가 비용도 감당하지 못해 낙담한 시인이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할 대로 해보라지” 하며 한껏 저주를 퍼붓는다. 4·19 혁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였다. 그의 ‘찌질함’은 가히 혁명적이다.

나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이 구절을 한참 들여다보고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그어두었다. 시간 나면 두 쪽 남짓한 짧은 글을 읽고 또 읽는다. 특히 경제의 풍경이 살벌해지면, ‘경제 방면의 책’을 읽었다는 시인을 찾게 된다. 경제의 기억은 짧고, 문학의 기억은 길다.

그다지 멀지 않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시작되어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경제 방면의 책’을 쓰고 가르쳤던 사람은 많았으나, 위기를 예상하고 경고한 사람은 적었다. 너무 적어서 찾아내기가 수월했고, 숫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경제학자는 정확한 수치 12명을 확인하고 이를 논문으로 남겼다.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기업이 무너지는 것보다 일자리가 더 빨리 무너졌다. 순식간에 2200만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근본적인 맹점이 드러났고 불평등 확대가 그 근저에 있는 것이니, 이번에야말로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문학적 메타포가 경제의 상상력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이라는 단어는 마치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경계 짓는 마법의 주술 같았다. 하지만 문학적 마술을 차용한 경제학의 현실은 금융시장의 버블, 공기물방울이었다. 현란한 찰나가 끝나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거품이 터지며 나는 ‘펏’ 하는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일자리를 지키자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런데 그 뒤를 꼭 따르는 소리가 있었다. 서민의 일자리를 위해서는 기업에 대한 과감한 지원을 아끼지 말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은행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물론 경제위기를 초래한 ‘피고인’ 신세이지만 서민들의 삶을 위해서는 이들의 잘못을 시시콜콜하게 따져서는 안 된다, ‘꼰대’가 아닌 ‘용서와 단합’의 시간이라는 것. 앞뒤가 착착 연결되는 ‘경제 방면의 책’ 논리는 순식간에 정치적 언어가 되었다. 정책이 만들어지고 나랏돈이 기업과 은행에 쏟아졌다.

효과는 있었다. 2~3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청신호가 들려왔다. 금융권도 좋아지고, 기업 사정도 나아졌다. 이제 아랫목이 따뜻해지자, 방안의 불편한 온도가 느껴졌다. 정부의 나랏돈 ‘인심’이 과해서 엉덩이가 뜨거워져 온다는 것. 이제 군불은 충분하니, 귀한 장작을 아끼라고 요구했다. ‘경제 방면의 책’에 따르면, 이는 인플레이션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재정 긴축이다.

듣기에는 그럴듯했다. 하지만 그건 아랫목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경제의 온돌방에는 구들이 부서지고 무너져서 열이 잘 전달되질 않는다. 아랫목이 들끓는다고 해서 윗목이 따뜻하지 않다. ‘낙수효과’의 부재는 낡은 온돌방의 고질적 문제다. 그러니 윗목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여전히 춥다. 웃풍도 심하다.

그래도 아랫목에 앉은 이들은 아궁이에 더 가까우니, 그들의 소리도 더 가깝다. 윗목은 아직 춥다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윗목 사람들의 목소리는 방문을 치고 들어오는 찬바람에 쓸려갔다. 병들고 죽고서야 그들이 보였다. 아랫목 사람 성화 탓에 아궁이로 들어가는 장작은 줄었다. 하지만 그들은 장작을 줄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아궁이를 건실하게 하는 ‘건전화’(consolidation)라고 불렀다. 항간의 오해와는 달리, 경제학은 필요하다면 기꺼이 문학적 표현을 사랑한다.

윗목까지 미열이 가는 데 참으로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 세계 전체를 보자면, 실업률은 꼭 10년 만에 경제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임금이나 노동소득은 더 심한 느림보였다. 아직 회복하지 못한 나라도 있다. 이 와중에 노동생산성은 꾸준히 올랐다. 윗목에서 춥게 살아도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노동생산성과 임금의 격차는 여전하고, 온돌방의 갈림은 심해졌다. 기업은 구제되었으나, 노동자는 배제되었다.

젊은 사람들의 사정은 더 어려웠다. 실업률은 아직 2008년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아예 온돌방 바깥으로 내쫓기는 일도 빈번해졌다. 이들을 위한 거처도 생겼다. ‘경제 방면의 책’에 따르면, 새로운 형태의 온돌방인데 ‘플랫폼 경제’라고 부른다. 이 신세대 온돌방은 독특하게도 아궁이를 아예 없애서 아랫목과 윗목의 갈등을 원초적으로 없앴다고 한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어서 ‘선진적’이지만, 방 구석구석이 한결같이 춥다는 소문이다.

이런 경제의 기억이 매듭을 짓기 전에 한파가 다시 닥쳤다. 이번에도 예상치는 못했지만, ‘경제 방면의 책’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돌방에 바이러스가 덮쳐서, 너나없이 다 쫓겨나서 임시천막 신세다. 기업은 잠시 또는 영원히 문을 닫고, 일자리도 삭풍의 계절에 들어섰다. 얼마나 무너질지 아무도 모른다. 문학의 기억을 빌리자면,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마음이 아프다”(‘먼 곳에서부터’, 김수영).

이번에도 ‘이번에는’이라는 말이 넘친다. ‘뉴노멀’이라는 표현도 인기몰이다. 기억이 힘이라면, ‘이번에는’은 이번에도 지난번과 같을 것이라 의심해야 할 일이다. ‘뉴노멀’도 지난 경제위기에 나왔던 새롭지 않은 수사다. 저번의 ‘뉴노멀’도 이루지 못했으니 ‘노멀’이 뭔지도 모른다.

대신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번에는 다르다”고 하면, 이번에는 누가 무엇을 바꿀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세상이 전혀 달라질 것이라고 하면, 아랫목과 윗목이 갈라지는 온돌방을 어찌할 것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라고 외치면, 고개를 끄덕이기 전에 누구를 위한 일자리가 얼마나 만들어지는지를 따져야 한다. 이를 위해 돈은 어디로 누구에게 가는지를 물어야 한다. 같은 온돌방에 산다고 ‘좋은 게 좋다’고 퉁치는 일도 없어야 한다. 윗목과 아랫목의 다름은 “이번에는 다르다”던 윗목이 지난번에 몸소 보여준 교훈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적으로 문학적인 ‘경제 방면의 책’보다 찌질한 살림살이를 살피는 ‘문학 책’을 읽는다. 그러면 경제학자로서 “사회에 대한 무슨 속죄라도 되는 것 같고 저으기 흐뭇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힘도 생겨서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봄밤’, 김수영)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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