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미슐레가 <민중>의 서문을 헌정했던 에드가르 키네의 부친은 군수품을 조달하던 군인이었다. 미슐레는 근대의 민중이 새로운 도약을 꾀할 수 있었던 두 방면으로 군대와 산업을 꼽았다. 키네는 군인 가족 출신이고, 자신은 아버지의 영세한 인쇄소에서 일했었기에 미슐레는 그 개인적인 경험들을 민중의 노정과 등치시키며 20년 지기였던 키네에게 그 서문을 증정했던 것이다.
키네의 부친은 군인이었지만 공화주의의 열렬한 신봉자로서 나폴레옹이 1799년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실질적인 독재자의 자리에 오르자 군대를 떠나 수학과 과학의 연구에 몰두했다. 키네는 부친의 그러한 성향을 물려받았다. 단지 아버지에 비해 아들이 훨씬 더 논쟁적이고 전투적이었을 뿐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역사학이 학문 분야로서 제도화되고 방법론을 확립시켜 나갔던 과정을 집중적으로 밝힌 한 책의 저자는 그런 학문적 혁신의 선행기로 키네와 미슐레는 물론 기조, 라마르틴 등의 역사가가 활동하던 시기를 꼽았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풍성한 학문적 결실은 전문적 역사가의 산물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평결을 내렸다.
나는 그 부정적인 판단에서 그들의 긍정적인 면모를 읽으려 한다. 그들은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현대 역사학의 엄격성을 넘어서 인간성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면 어떤 시도도 마다치 않았다. 키네 역시 그 목적을 위해 국경을 초월했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자 헤르더의 <역사철학 개요>를 번역하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고, 현대 그리스의 원류를 추적하는 저작을 집필했으며, 미국의 경건주의자 에머슨의 통찰을 기꺼이 얻으려 했다. 그는 역사학의 경계도 초월하여 많은 서사시를 남기면서 문학잡지의 편집인도 맡았다.
키네는 ‘2월혁명’ 이후 선거로 대통령이 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망명을 떠남으로써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역사는 이렇게도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