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1991년에 시작된 그 전쟁은 21세기에 들어서야 끝나며 평화조약을 통해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라는 결말을 보았다. 새롭게 생긴 여덟개의 국가는 국제적으로 완전하게 인정하며 전쟁이 종식되었다고 해서 인종과 종교의 문제가 복잡다단하게 뒤얽힌 그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이 가려질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이 전쟁 기간은 인간성을 침해한 전쟁 범죄가 빈발했다는 사실로도 악명 높다. 인종 청소와 집단 강간이라는 범죄는 그 자체로도 극악하지만, 그 둘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패악은 언어로 형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
전쟁이 끝나고 10년도 지나기 전에 사라예보의 한 지역인 그르바비차에서는 신원 미상의 매장된 시체가 대규모로 발견되어 확인하려는 유족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보다 더 악랄한 사실은 그곳의 수용소에서 집단 강간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지 성욕을 채우기 위한 강간이 아니었다. 보스니아 여인들을 임신하고 출산할 때까지 감금하고 강간하여 그 후손을 세르비아인으로 만들려는 계획 아래 이루어진 새로운 종류의 인종 청소였다.
그 인근에서 자란 영화감독 야스밀라 주바니치는 <그르바비차>라는 영화를 통해 상처를 받았음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그 여성들의 운명을 그렸다. 지우고 싶지만 여전히 오늘을 붙잡고 있는 그 끔찍한 기억을 집단 강간을 당한 여성과 그 결과로 태어난 딸 사이의 갈등을 통해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주바니치는 그 주동자들이 여전히 활보하고 있던 사실에 분개하며 그 범죄를 고발한다. 또한 그럼에도 삶은 이어져야 한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보스니아,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독일의 영화사들이 공동으로 제작했다.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대한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영화는 2006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