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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의견 말고 팩트를 보여달라

등록 2020-05-19 20:56수정 2021-10-15 10:16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지난 칼럼에 “재판 보도 바꿔보자”고 썼다. 이틀 뒤 조국 전 장관 첫 재판이 있었는데, <한겨레>의 보도가 좀 달라졌다. 검사와 변호인 신문 결과를 종합해 치우치지 않게 기사를 쓰고 제목을 뽑았다. 이튿날은 ‘조국 재판 정주행’이라는 신설된 온라인 코너에서 재판정에서 오간 문답까지 자세히 풀어 재판의 전모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이런 변화가 쌓이면 재판 보도에 대한 독자의 믿음도 회복되리라 생각한다.

지난 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상징적 인물인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했다. 한겨레는 수요집회 성금의 용처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자회견 기사를 당일 쓰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온 놀라운 발언들이어서, 사정을 더 알아보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30년 위안부 인권운동’의 정당성을 허물 수 있는 사안이기에 신중하게 대응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 뒤 일부 언론이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이상한 회계 처리’와 윤미향 대표가 2015년 ‘12·28 합의’의 주요 내용을 사전에 알았는지를 두고 의혹을 제기하는 방식은 먹이를 본 ‘하이에나’를 연상케 했다. 그 와중에 한겨레가 외교부 출입기자의 ‘복기’를 통해 위안부 합의의 굴욕적 내용은 정부가 발표 전까지 은폐했음을 드러낸 기사는 돋보였다.

하지만 계속된 신중함은 ‘사실(팩트) 부족’과 같은 말로 비칠 수도 있다. ‘안성 힐링센터 고가 매입’을 온라인 보도한 17일까지 일주일 이상 한겨레는 다른 언론이 제기한 의혹을 한발 뒤에서 확인해갔다. 이러다 보니 정의연과 윤미향 대표에 대한 독자의 의혹의 눈초리가 올라갈 때 한겨레가 일삼아 두둔하는 인상을 주었다. ‘정의연 해명에도 회계 오류…국세청 ‘고의성은 없다’ 판단’(5월13일치) 기사에는 “문제가 제기됐으면 제대로 파라. 한통속이라고 짝짜꿍하지 말고”(miya****), ‘윤미향 개인계좌로 조의금…회계사 “투명 집행 땐 문제없어”’(5월15일치) 기사에는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하는 곳이 언론이다. 언론이기를 포기했냐”(joo7****) 같은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남들처럼 의혹을 부풀리라는 주문이 아니다. 이용수 할머니가 놀라운 기자회견을 하게 된 궁금증을 풀어달란 것이다. 한겨레는 개정된 취재보도 준칙을 알리며 “부분적 사실 넘어 ‘전체 진실’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사안의 전체 진실은 정의연의 방식이 할머니들의 뜻과 어떻게 달랐기에 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일 것이다. 정의연의 독선이든, 개인 사업 같은 운영 방식이든 ‘사실’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달라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매서웠던 한겨레 취재의 예봉은 진보개혁 진영 앞에서 종종 무뎌진다. 옳을 것이란 믿음은 때론 ‘편견’이 된다. ‘탈원전’이 당위라 해도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관련 감사를 해놓고 결과 발표를 미루는 감사원의 속내를 독자가 몰라도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일이지만 최저임금 인상도 정부의 ‘미숙 운전’을 드러내야 정책도 살릴 수 있었다. 사실을 ‘장악’해야 진보개혁도 인도하고, 해명도 잘해줄 수 있다.

<워싱턴 포스트> 편집국장이던 벤 브래들리는 젊은 기자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틴이 취재와 보도에 매우 공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중앙일보> 2010년 4월7일치). 그런 자세를 그는 무척 좋아했다. 후배가 써온 기사를 놓고 그는 검사처럼 따지고 들었다. 취재원이 말한 그대로 들려달라 요구했다. 다 듣고 오래 고민하던 그는 “가자”고 한다.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낸 워터게이트 보도는 이렇게 시작됐다. 브래들리는 정확하고 공정한 신문의 첫걸음은 편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한다. “기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 신문사 조직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그 바탕 위에서 철저히 확인하고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제대로 알면 알수록 편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좋은 일은 아니지만 ‘직업적 회의주의’랄까, 누구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한겨레 뉴스룸에서도 이런 말을 더 자주 하면 좋겠다. “당신의 의견 말고 팩트를 보여달라.”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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