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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음모론이 활약할 시간 / 전상진

등록 2020-05-17 18:44수정 2020-05-18 14:48

전상진 ㅣ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위기에 정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어떻게 해야 안전할지’나 ‘대체 언제 위기가 끝날지’를 절박하게 알고 싶지만, 의사도 대통령도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한다. 마스크만 하더라도 방역 전문가들의 주장이 일관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우왕좌왕했다. 종잡을 수 없어 무섭고 답답했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과학적이고 공식적인 정보가 ‘고구마’라면 음모론과 같은 ‘자유로운’ 정보는 ‘사이다’다. 사이다가 위장병을 치료해주지는 못하지만 답답한 속은 풀어준다. 자유로운 정보는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지만, 속은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자유로운 정보가 시원스러운 이유는 이중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첫째, 골치 아프고 지루한 검증에서 자유롭다. 엄격한 과학적 절차를 따라 검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사실관계를 엄밀히 따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무엇보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다. 만약 과학자나 저널리스트나 정부 당국자가 잘못된 정보에 입각해 게으른 주장을 하면 어떤 형식으로든 추궁당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정보의 생산자나 유포자는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둘째, 선택이 자유롭다. 자유로운 정보는 수요자의 ‘자유로운’ 선택권을 보장한다. 그와 달리 과학적이고 공식적인 정보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다. 하늘을 날고 싶어 연구실 창문으로 가다가도 그러면 죽는다는 과학자의 만류가 기억난다. 카메라 앞에서 헛소리나 해대는 정치인들을 때려주고 싶은데 그러면 감방 간다고 법관들이 경고한다. 그와 달리 자유로운 정보는 여러모로 자유롭다. 음모론을 접했더라도 그것이 마음에 안 들면 자유롭게 무시하거나 다른 음모론을 찾으면 된다. 그러니까 음모론은 수요자에게 자유를 제공한다. 믿고 싶은 걸 믿을 수 있는 자유!

코로나 위기가 심각한 곳에서 자유로운 정보가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다른 많은 국가에 비해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의 “모범 국가”이므로 코로나19에 관한 자유로운 정보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은 자유로운 정보에서 자유로운 청정 국가일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현재 이곳에서 각광받는 자유로운 정보는 선거와 관련한 음모론이다. 21대 총선은 163석 대 84석, 집권여당의 일방적 승리와 제1야당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그런데 49.91%와 41.45%라는 득표율을 생각하면 통합당의 낙선자들과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의석수 차이가 억울하고 고통스럽다. ‘우리 주위엔 민주당 지지자가 한명도 없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감정적으로 참을 수 없다.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도 없다. 인지적으로 납득할 수도 없다. 고통은 어떻게든 설명되어야 한다. 선거 패배로 이미 아픈데, 설명되지 않아서 더 아프다. 설명이 필요한 시간, 음모론이 활약할 시간이다.

음모론은 세 가지 요소와 세 가지 배역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①“세상에 우연은 없다.” ②“모든 건 서로 연결되어 있다.” ③“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선하고 무고한 피해자, 그를 괴롭히는 음모집단, 그에 맞서 피해자를 돕는 영웅적인 주인공(음모론자). 악역인 음모집단이 시시하면 얘기가 재미없다. 전지전능한 악마여야 한다. 음모집단이 장막 뒤에서(③) 조율된(concerted) 행위(②)를 통해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사건(①)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한다.

총선 음모론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점차 판이 커지고 있다. 사전투표가 수상하다는 의혹으로 시작하여, 총선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의혹을 거쳐, 급기야 선거 조작의 증거가 사라지고 있다는 의혹(조작의 증거가 보관된 물류창고 화재)까지 나왔다. 극우 유튜버가 음모론을 차곡차곡 쌓고, 그에 동조하는 정치인이 점차 늘면서(증거보전을 신청한 통합당 낙선자 14명) 더 큰 그림이 그려진다.

정말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면 큰 문제겠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마땅하지 않다. 그래서 통합당도 부정선거 음모론과 거리를 둔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탁현민 청와대 자문위원은 그런 음모론이 낯익다고 했다. 자신도 2012년 대선의 패배를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승부에서 패하면 아프다. 아픔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음모론을 통해 패배를 부정하고 ‘정신 승리’ 하기. 둘째, 패배한 이유를 살펴 다음에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높이기. 당장은 고되더라도 미래의 아픔을 방지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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