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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암약’하는 소방관들에게 응원을

등록 2020-05-05 18:11수정 2020-05-08 10:09

하종강

“현장에 도착해 냄새를 맡으면 ‘아, 이게 사람 타는 냄새다, 몇명이 타는 냄새다’ 바로 감이 오는데 거기서 명령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나? 가족들이 불 속에 갇혀 있다고 울부짖고 뛰쳐나오는데? 화재는 골든타임이 5분이 아니라 5초예요.” 소방관들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해묵은 서러움들이 목까지 차올라 자꾸 목이 메었다.

계룡산 근처 민박집에 소방관노조를 준비하는 소방공무원들이 은밀히 모인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소를 대전 부근으로 잡았다는 것은 전국 규모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모든 활동이 수도권 중심인 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시대에는 전국 규모의 행사라면 서울에서 열리는 것이 상례였지만 요즘은 중부권에서 모이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는 내려오고 아래에서는 올라가 그 중간쯤에서 만나는 것이 공평하다는 취지이다. 넓은 의미로 지방분권의식 확대의 성과다.

전국에서 모인다고 했지만 불과 10여명의 소방관들이 민박집에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만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날 처음 모이는 것이어서 서로 얼굴과 이름을 모른다고 했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던 별명들을 가슴에 써 붙인 소방관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둘러앉았다.

‘불나방’이라는 별명을 써 붙인 소방관이 있기에 가볍게 말을 건넸다. “소방관에게 썩 어울리는 별명이네요.” 그 소방관이 내 말을 받는데 봇물 터지듯 사연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불 보면 그냥 들어가니까…. 나중에 검찰청에서 조사받을 때 새파랗게 젊은 검사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명령권자가 누구였냐?’ 그것만 자꾸 물어보는데, 소방관들은 그렇게 일하지 않거든요. 현장에 도착해 냄새를 맡으면 ‘아, 이게 사람 타는 냄새다, 몇명이 타는 냄새다’ 바로 감이 오는데 거기서 명령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나? 가족들이 불 속에 갇혀 있다고 울부짖고 뛰쳐나오는데 거기서 명령받을 때까지 기다리고 서 있나? 화재는 골든타임이 5분이 아니라 5초예요. 우리는 불 보면 그냥 들어가거든요. 그거 무서우면 소방관 못 하죠.”

저녁 뒤풀이 자리에서 앞에 앉은 소방관에게 “존경한다는 뜻으로 제가 먼저 한잔 권해드리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옆자리 소방관이 잽싸게 소주병을 낚아채 가며 말한다. “관창수가 최고죠.” 무식한 나는 ‘관창수’라는 단어를 그날 처음 들었다. 화재 현장에 도착해 소방 호스의 맨 끝에 달려 있는 ‘관창’을 붙들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관이 바로 ‘관창수’다. 사람이 잘못 맞으면 목뼈가 부러지고 몸이 날아갈 정도로 수압이 센 물줄기를 화점에 정확하게 조준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장 실력 있는 소방관이 그 일을 담당한다고 했다. 소주병을 낚아채며 “관창수가 최고지”라고 한 말은 술자리에서는 소주병을 쥔 사람 마음대로 따르는 게 법이라는 뜻이다.

지방직 공무원인 소방관들의 처우가 열악하고 선진국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노후화된 장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삶 자체가 드라마인 소방관들은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해묵은 서러움들이 목까지 차올라 자꾸 목이 메었다.

“지난번에 화재 진압하다가 건물이 무너져 소방관들이 순직한 사건 있었잖아요. 그게 사실은요… 통신 장비가 너무 구식이라… 성능이 안 좋아서… 건물 안에 깊이 들어간 동료들에게 퇴각 명령 전달이 안 됐어요. 빨리 나오라고 아무리 외쳐도 그게 전달이 안 됐어요.”

사명감이 투철하고 관창수 일을 많이 해본 소방관들이 오히려 승진이 잘 안되고 있다는 이야기, 간부들이 소방관의 고충을 헤아리기보다 민원이 발생해 승진에 지장을 받을까 봐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이야기, 먼 곳으로 발령받게 될까 봐 국가직 전환을 오히려 꺼리는 관리자도 있다는 이야기, 취임식에서 인사말을 하던 고위 간부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해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당신이 불 끄는 소방관들의 심정을 압니까?”라고 외쳤던 바람에 여러번이나 인사이동을 당했던 이야기… 그 밖에 차마 외부에 알리기 어려운 사연들을 듣다가 날밤을 새웠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꽤 오래전 일이다. 그날 밤을 새운 토론 끝에 정리한 장기 목표는 두가지였다. 소방공무원의 국가직화와 소방공무원노조 설립이다. 우여곡절 끝에 소방공무원의 국가직화는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돼 47년 만에 꿈을 이뤘다. 지난해 4월 고성과 속초 산불이 1267㏊의 산림을 태웠던 것에 비해 며칠 전 고성 산불에서 피해 면적을 85㏊로 줄일 수 있었던 것에는 소방공무원이 국가직이 되면서 소방청장이 시·도지사 결재 없이 곧바로 소방동원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도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날 계룡산 민박집에 모였던 소방관들은 두번째 꿈인 소방공무원노조 설립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정의로운 소방관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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