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하 ㅣ 정치칼럼니스트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은 의석수가 교섭단체를 꾸릴 정도에 이를 것이라는 애초의 전망에 크게 못 미치는, 제자리걸음에 불과한 성적을 받았다. 득표율이나 일부 지역구에서의 선전을 근거로 반쪽의 성공은 거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진보정당이 국회 한편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고, 6석은 지난 총선 국민의당이라는 제3당 돌풍이 부는 와중에 거둔 성적이었다는 사정도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 대응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거대 양당의 비례정당 창당일 것이다. 그러나 남 탓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거대 양당의 ‘꼼수’를 돌파할 방법이 정말 없었는지를 자문해야 한다. 비례정당 얘기가 처음 나오던 시기에는 유권자들이 이런 꼼수를 인정할 리 없다는 이유로 사태를 낙관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양쪽 지지자들이 최대 결집한 이번 선거 결과는 국민들이 꼼수의 필요성을 오히려 인정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국민들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선거법 개정에 동의한다는 것은 최대 수혜자인 정의당의 영향력 확대를 용인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양당의 비례정당을 주로 선택한 것은 결국 거대 양당의 이익을 선거제도 개혁의 당위와 정의당의 영향력 확대보다 앞에 놓았다는 뜻이다. 정의당의 원내정치가 정권심판 대 야당심판의 프레임을 뚫고 자기 존재감을 획득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방증이다.
정의당은 정권과 여당의 ‘개혁’에 보조를 맞추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실리도 챙기는 전략을 구사해왔다. 대다수 국민의 눈에 정권과 개혁이 겹쳐 보일 때 이런 전략은 나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정치적 중심이 옅어지면서 정의당의 정체성도 덩달아 표류하게 되었다.
조국 전 장관 문제는 이런 난점이 드러난 기로였다. 보수언론은 정의당이 선거법과 조국 전 장관 임명을 맞바꾸었다고 해설했다. 정의당의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모를 사과는 이 해석이 맞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정의당은 민중의 대변자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에 앉아 서로 이해관계를 다투는 기득권 정치의 일원으로 비치게 되었다.
이 광경은 정의당을 포함한 진보정치 전체가 처한 근본적 위기를 보여준다. 전통적으로 진보정치는 제3세력론과 계급투표론을 주요 지지 논리로 내세워왔다. 거대 양당이 노동자 서민의 정치적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으므로 이를 제대로 대변할 제3세력으로서의 진보정당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이때는 진보정치 지지 논리의 두 축이 서로 다른 얘기일 수 없었다. 제3세력론의 구호인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는 기업으로부터의 자유와 소외되는 이들이 겪는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의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제3세력에 대한 기대의 형태가 변화하면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 주인인 당을 찍으라는 계급투표론은 실종됐다. 오늘날 각광받는 제3세력론은 거대 양당을 기득권이 아니라 ‘극단적 세력’으로 규정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팬덤과 이른바 ‘아스팔트 우파’의 등장은 ‘깨끗하고 유능한 정치’를 포퓰리즘에 대항하는 엘리트 정치의 복원처럼 보이게 했다. 과거 ‘안철수 현상’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고, 진보정치도 바닥을 다지기보다는 ‘진보판 안철수’로 비유할 만한 쉬운 길을 선택했다. 정의당은 물론 이번에 거대 양당의 비례정당 전략에 사실상 참여한 기본소득당과 녹색당 등 ‘군소정당’들까지, ‘없는 사람들이 주인인 정당’을 자처할 수 없게 된 진보정치는 대중적 차원에서 안철수식 ‘새정치’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어려움은 한국의 진보정치만 겪고 있는 게 아니다. 진보가 엘리트의 전유물처럼 돼버린 나라들에선 예외 없이 극우포퓰리즘이 창궐하고 있다. 극우포퓰리즘의 동력은 노동자 서민 등 진보가 대변했어야 할 사람들이다. 이것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여전히 대중의 지지로 버티는 진보정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결은 크게 두가지다. 첫째는 오랜 세월 타협하지 않고 자기 노선을 지켜온 상징적 인물이 있다는 것, 둘째는 직접 대중 속으로 들어가 자기 비전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의당이 한국에서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을까? 과거 진보정치는 ‘단체’를 통해 대중을 만났지만, 대중운동의 몰락과 고립 때문에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것도 진보정치가 기득권 정치에 의존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제는 진보정치가 대중을 직접 만나야 한다. 기득권 정치의 합리적 중재자를 자처할 게 아니라 소외된 대중의 목소리를 원내에 직접 전달하는 스피커가 돼야 한다. 국회를 왼쪽에서 잡아당기면서, ‘개혁’을 말하는 세력이 기득권 정치와 노동자 서민 사이에서 중재를 설 수 있게 해야 한다. 2004년 국회에 처음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소수’ 전략이라는 전례도 있다.
이게 여전히 가능하다는 걸 우리가 목격한 순간도 있었다. 가령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를 만난 여성 유권자들은 종종 그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누구도 자신들을 대변해주지 않았다는 정치적 절망감의 표현이었을 거다. 여성 표의 득실을 따지는 계산보다 위로가 먼저였고, 심상정 후보는 말 없는 포옹으로 화답했다. 당시 얻은 200만표에는 이런 정치적 약자들의 기대감이 반영돼 있다. 정의당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6411번 버스의 정신은, 이제 다시 이들을 찾아가는 것으로 되살려야 한다. 다른 진보정당들도 마찬가지다.
『왜소해진 진보정당의 내일』
「21대 총선 뒤 정의당과 다른 진보정당의 ‘반성’이 얼마나 처절하고 집요한지 쉽게 검색되지 않는다. 혹자는 진보정당 위기의 현주소라 말할 법하다. 반성과 비전은 안 보여도 전설은 있다. 2004년 지역주의에 기대 캐스팅보트 구실을 할 수 있었던 제3당 자유민주연합을 압도하며 원내에 처음 진입한 당이 바로 정의당(당시 민주노동당)이다. 그때 김종필 자민련 비례후보 1번을 꺾고, 민노당 말번으로 당선된 이가 노회찬 비례후보(8번)였다. 제3당으로 매김하는 데 공여했던 노 후보가 8년 뒤인 2012년 당대표직(진보정의당)을 수락하며 던진 화두는 ‘6411번 버스’였다. 혹자는 울며 들었던 “(그 새벽 버스를 꽉 채우는)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진보정당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란 반성이었다. 다시 8년이 지난 2020년, 진보정당은 총선에서 참패했다. 대중·운동 정치가 필요하다는 두 전문가의 분석을 이제 2002년인 양 들어본다.」
[이슈논쟁] 울분을 나누는 ‘활동가 정치’가 필요하다
김수민 ㅣ 정치평론가
이번 총선 정의당의 비례대표 득표는 나쁘지 않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얻은 전국 광역의원 비례대표 득표율은 8.97%(득표수 226만7690표)였고, 2020년 총선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9.67%(득표수 269만7956표)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상향식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 쪽이 ‘정의당 표밭도 잠식하겠다’고 호언했지만, 이들은 득표율 5.42%에 머물렀고 정의당의 득표율은 2년 전보다 소폭 올랐다. 민주당 극성 지지층이 인터넷에 퍼뜨리던 “(민주당에 협력하지 않는) 정의당은 이제부터 찍지 않겠다”는 엄포에 힘이 없음을 확인한 것은 덤이다.
그 밖에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던 세력의 성적표는 처참하다. 단지 지지율이 너무 낮아서가 아니다. 소수정당의 최후 보루는 이념적 명분이다. 이 중 민중당, 미래당, 녹색당 등은 민주당 위성정당의 들러리를 자원하는 반칙행위로 존립 기반을 저버렸고, 결국 민주당한테 거부당하며 정치기술에서도 대망신을 당했다. 자진해서 총선을 포기하는 반성조차도 보여주지 않았다.
이렇게 되짚어보니 정의당도 결코 선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원외 진보적 정당에서 이탈한 표심은 대부분 정의당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해도, 그 한표 한표의 신념과 활동성은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할 밑천이다. 그러나 정의당의 일상은 이들을 떠받칠 터전을 충실히 준비하지 않았다. 선거철에 불거진 위성정당 논란이 그나마 이들의 가세를 풀무질한 것 같다. 정의당은 선거 도중 지난해 조국 사태 대응을 반성할 때마저 무기력을 노출했다. ‘민주당 정권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책을 반성’했다. 개표 직후 정의당이 흘린 눈물에는 ‘결사항전’의 흔적이 없다. 휘둘린 것에 대한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있을 뿐.
2000년대 초중반이나 지금이나 진보정당이 민주당과 제1야당 모두에 맞서 싸우기 좋은 구도다. 다만 그때 민주노동당에는 지금의 정의당엔 없는 것들이 있다. 그때는 “내가 한나라당을 지지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과거의 보수층에 속한 서민 유권자나 정치가 싫은 무당층에게도 뻗어나갔다. 지금은 민주당과 단일화하지 않으면 영남공업벨트에서도 당선자를 낼 수 없는 정의당이 있다. 또 한때는 “민주당에 실망해서” 민주노동당으로 옮겨가는 유권자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실망을 하더라도 대안이 없으니 그냥 지지하거나, 심지어 실망할 일이 생겨도 실망을 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권이나 거대 야당에 대한 실망과 분노도, ‘잘못하고 있다’고 큰소리 내며 알리고 지속적으로 대중과 대화하면서 설득력을 갖추는 쪽이 있어야 생기는 법이다.
정의당의 독자성이 흐릿해진 건 ‘운동정치’가 퇴조한 귀결이다. 최근 수년간 그쪽에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나 ‘책임 윤리’가 거듭 울려 퍼진 것까지는 좋았으나, 의석이 6석뿐이면서도 발언대와 미디어 출연에 머무른 것은 소명이나 책임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서 학교급식조례 운동이나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운동 같은 활동들은 사라졌다. 거대 정당과 협조를 주고받아야 할 입법보다 더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사업들이었다. ‘투쟁현장을 열심히 방문했다’는 반박은 사절한다. 운동정치는 운동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키는 것이다.
이번 총선 결과가 비추는 진보정당의 진로는 너무나 명확하다. 집권세력은 독자적으로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이 가능한 의석(180석 이상)을 확보했다. 선거제도 개혁의 경우, 민주당이 스스로 위성정당 방지법을 만듦으로써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되살리면 그만이다. ‘검찰개혁’ 같은 중·상층 개혁 담론에 정의당이 엉거주춤 따라나설 이유도 없다.
제20대 국회에서도 진보정당이 항거할 일은 많았다. 거대 양당은 최저임금 조삼모사(산입범위 확대), 개인정보 빗장 풀기(데이터3법), 시민의 알권리보다 우선하는 재벌의 비밀경영 보장(산업기술보호법. 정의당과 민중당의 무감으로 반대조차 없었다) 법안을 통과시켰다. 모두 대자본의 이권이 시민의 권익을 압도하는 법안들이다. 민주당이 미래통합당 이상으로 주도한 것들이므로, 제21대 국회에서도 진보정당이 사활을 걸고 저지해야 할 사안들이 속속 등장할 것이다. 어차피 의석수로는 막을 수 없다. 힘을 얻으려면 거리로 나가야 한다. 인디밴드에게 버스킹이 불가피하듯이 말이다. 의회 전략도 재고해야 한다. 모범적 의원님보다 인민의 울분을 같이 터트리는 활동가가 더 절실하다. 의석 없는 원외 정당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존립 이유부터 의심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더 해보겠다면 사회단체로서의 역량이라도 갖춰야 할 것이다.
옛날 옛적 진보 진영에는 선거와 의회를 얕잡아보는 편향이 있었다. 최대 규모 선전전과 사회 갈등의 집결지도 활용 못 하면서 변화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숱했다. 그리고 그 후, 제도권으로 가는 길이 좁게나마 트이면서 진보 진영은 또 다른 편향에 휩싸였다. ‘운동정치’를 과거의 ‘운동권 방식’과 동일시하면서 예전의 강점과 성취조차 곱씹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두 편향은 의회 안팎을 분리한다는 점에서 실은 같은 것이다. 의회는 ‘부르주아 정치’의 전유물이 아니며, ‘운동’도 장외 불만세력의 습관이 아니다. 의회와 가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한다. 필자도 15년 전쯤엔 ‘의회’를 강조했었는데 이제는 ‘운동’을 역설할 수밖에 없다. 안과 밖이 따로 있지 않은데도, 안을 고집하는 경향이 밖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