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옛날 부분적으로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비코의 생애와 저술>이라는 평범한 제목인데 1935년 영국에서 출간되었다. H. P. 애덤스라는 저자의 이름도 생소하여 검색을 해봐도 정보가 없다. 비코의 주저와 자서전의 영어 번역본이 출간되어 영어권에서 비코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 1940년대 중후반의 일인데 그보다 훨씬 앞서 발간된 책이기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보물일 줄이야.
이탈리아어 원전에 통달한 것은 물론 주변적 자료까지도 두루 섭렵했고, 별로 길지도 않은 책 속에서 비코의 삶과 사상을 유려한 필치로 유럽 철학의 체계 속에 안착시켰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플라톤이 본디의 플라톤이 아니라 피치노나 파트리치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이 해석한 플라톤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논박할 수 없는 논거에 도달해서는 무림 도처에 숨은 고수들이 전해주는 검법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래전에 절판되어 도저히 구할 길이 없기에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복사한 뒤 제본하여 소장하고 있는 그 책 뒷부분 한 곳의 가장자리 여백에 그 책을 이미 읽었던 선인이 연필로 남겨놓은 메모가 눈에 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지만 뭔가 심상치 않아 다시 세밀하게 살펴보니 꿈에도 잊지 못하는 은사의 필치와 흡사하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유학 시절의 기말 보고서에 남긴 은사의 논평 필적과 대조하니 그가 남긴 메모임이 확실하다. 그 부분의 내용도 학위 논문 작성 시절 은사가 선문답처럼 던져줬던 권유와 일치한다.
치매에 걸려 병상에서 삶을 마감하신 그분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든다. 그와 동시에 이 책에 대한 신뢰도 더욱 커진다. “결국 우리가 문학 작품 속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삶의 흔적”이라는 에리히 아우어바흐 명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그 흔적이 곧 역사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