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정 ㅣ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미국은 스페인 독감과 함께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그 미국이 이제 코로나19와 함께 퇴락하는 것인가?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1918년 독감은 전 세계를 맹타했다. 5천만~1억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이 1500만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으니 독감은 이보다 적어도 3배 이상을 죽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독감이 모든 나라를 공평하게 못살게 군 것은 아니었다. 독일은 인구의 3.8%인 23만여명을 잃었고 헝가리는 인구의 12.7%가 희생됐다. 해서 정치학자 프라이스스미스는 1918년 독감이 동맹국의 패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독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가 마비되어 결국 그 붕괴를 가속화했고, 독일군이 두차례 시도한 1918년 공세도 독감 때문에 군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도 67만5천명 이상이 죽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독감으로 인한 어마어마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는 탄력 있는 회복력을 보여주었고 군대와 군수물자를 증파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그런 미국의 힘에 기대 연합국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 승리와 함께 미국은 일약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00여 년 후인 지난 1일 뉴욕에서는 매우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그날 케네디 공항에 러시아 군용기가 착륙했다.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호흡 장비와 마스크를 싣고 온 것이다. 미국은 치솟는 확진자 수에 비해 의료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비상이 걸린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이틀 전 긴급지원을 호소해야 했다. 얼마 전까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냉전시기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러시아에 긴급지원을 요청하고 중국에서 마스크를 긴급수입해야 하는 미국, 100년 전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이 무리일까.
중국이 코로나19로 신음하는 동안 미국은 이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비웃으며 뒷짐 지고 있었다. 중국에 대한 지원도 없었다. 중국을 지켜보느라 방심했던가, 스스로의 방역조차 소홀히 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바이러스는 창궐하여 이미 확진자는 30만명을 넘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고가 됐다. 그런데도 아직도 급증하고 있다. 이 추세를 언제 꺾을 수 있을지 전망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여파로 지난 2주 사이에만 1천만명이 실직자가 됐다. 최악의 경우 실업률이 30%를 넘길 수 있다는 전망이다. 정부가 연신 현금을 경제에 쏟아붓고 있지만 경기는 계속 가라앉고 있다. 아직 그 바닥을 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코로나19가 주는 경제적 충격이 1929년 경제대공황보다 더 클 것이라는 전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기 코가 석자나 빠진 미국에 세계의 지도력을 기대할 수는 없겠다. 더구나 트럼프 정부는 이미 스스로 그런 역할에서 손을 떼지 않았는가. 문제는 다른 나라에 도와달라고 손을 벌리는 정도가 아니라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에 해가 되는 행동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유가 폭락을 막기 위해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감산을 요구하면서 미국 스스로는 감산할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마스크를 생산하는 기업 쓰리엠(3M)에 캐나다와 중남미 나라들에 대한 수출 중단을 요청해 이들 나라의 반발을 사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미국은 프랑스가 구매한 중국 마스크 수백만장을 가로챘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까.
코리 샤키 국제전략연구소 부소장은 단언한다. “더 이상 아무도 미국을 세계의 지도자로 보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제대로 지도력을 보여주었더라면 세계는 코로나19 대유행에 좀 더 잘 대처했을 수 있었겠지만 “미국 정부는 이 지도력 시험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는 한걸음 더 나간다. “서구에서 동양으로 파워와 영향력의 전이가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코로나19 위기는 중국의 부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도 세계적 경제침체에서 자유롭지는 않겠지만 미국이나 서구보다 앞서서 경제를 되살리고 있다. 이탈리아와 이란에 막대한 의료지원을 제공하며 ‘건강 실크로드’를 구축하겠다고 나서는 한편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섬나라까지 의료지원을 확대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전으로 이끈 주력이었지만 유럽에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를 전파한 주범이기도 했다. 그 바이러스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권력 전이를 앞당겼다. 코로나19는 미국의 쇠락과 중국의 부상을 가속화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