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인류애를 실천하면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애국자였고, 뛰어난 지식인이자 동시에 파리의 살롱을 주도했던 사회인으로 열정과 미모를 겸비한 밀라노 출신 크리스티나 벨조이오소 공주는
‘잊힌 공주’라는 제목으로 10년 전 여기에 등장했었다. 그를 지금 다시 소환하는 것은 단지 세월의 하릴없는 흐름 속에 그가 잊힌 것이 아니라 완고한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망각당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그의 살롱에는 저명한 정치가, 시인, 소설가, 음악가, 화가들이 출몰했다. 모두가 그를 연모했다. 그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도 대상은 공주였다. 그들은 앞다퉈 그에게 편지하며 구애했다. 반면 공주는 티에르, 미녜 같은 역사가들과만 우정을 나누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냉정했다. 충족되지 못한 구애자들은 공범이 되어 그가 불감증에 걸린 성격파탄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훗날 마르크스까지도 미슐레보다는 벨조이오소의 펜을 통해 읽으라고 라살에게 권했던 비코의 <새로운 학문> 번역은 물론 네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가톨릭 교리의 역사>까지도 친한 역사가들이 대신 써준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럼에도 존경하던 이탈리아 독립의 영웅 카부르의 노선을 따라 꿋꿋하게 행동하던 그에게 돌아온 카부르의 반응이 치명적인 독화살이 되었다. 병의 치료를 위해 수입하려던 희귀한 약초를 카부르가 압류하고 있었다. 공주에 대한 악소문은 카부르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약초를 돌려달라고 요청한 공주가 마약에 다시 취하려 한다고 생각했던 카부르는 악담을 퍼부으며 “그 독약을 돌려주되 가장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라”고 부관에게 서면으로 지시했다. 그 편지가 카부르의 전기에 실려 널리 읽히게 되었다.
한 세기도 더 지난 뒤 미국 학생 하나가 공주에 대해 학위 논문을 쓰려고 결심했다. 저명한 역사가였던 그의 지도교수에게서 돌아온 즉각적인 대답은 “아, 그 창녀 약쟁이!”라는 것이었다. 몽매함은 이렇게 끈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