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가 아시아를 건너 유럽에 도착하던 몇주 전, 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프랑스의 조그마한 동네에서 출발한 버스는 국경을 넘어 스위스 제네바로 간다. 버스의 공기는 무거웠고 승객의 시선은 낮게 깔렸다. 출발점에서 버스에 올라탄 나는 뒤쪽으로 갔다. 조금 높이 올라 있는 뒷좌석에서는 바깥 풍경과 안쪽 경치가 다 보인다.
나를 보는 눈빛이 따갑다. 얼핏 훔쳐보기도 하고, 무심한 척 노려보기도 한다. 나의 검은 머리, 낮은 코, 동그란 얼굴. 단지 그것 때문에 나는 걱정하고 눈치 본다. 마치 내가 저 소문의 바이러스를 몰고 온 것처럼, 버스 바닥에 깔리는 깊은 침묵이 나의 잘못인 듯, 나는 숨을 죽이고 바깥만 본다. 이럴 때는 꼭 마른기침이 찾아온다. 침을 삼키고 버틴다. 동네 어귀에서 중국인 한명이 탄다. 말없이 모자를 눌러썼다. 서로 모른 척한다.
평생 싸워온 고질병이다. 그럴 일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몸이 움츠러든다. 저쪽이 바라보는 눈빛 속으로 들어가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아프리카 어느 정글에서 시작된 악취 나는 전염병이 된다. 또 그런 눈빛에 익숙해지면, 우리는 이유 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워한다. 지독한 열등의식은 내가 몸속에서 오래 키워온 바이러스다. 방심하면 슬그머니 파고드는, 완치 불가의 병. 그제야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고개를 든다. 손수건을 꺼내고, 위장 구석 어디까지 밀어 넣었던 기침을 불러올린다. 나보다 코가 높은 승객들이 돌아본다.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어느 기자는 부끄럽다고 했다. 확진자를 샅샅이 찾아서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것도 민망하고, 그런 나라에서 온 자신 옆에 앉은 재수 없는 미국인에게 미안했다고 한다. 부끄러움은 더 깊이 숨겨진 감정의 잘못된 표현 방식일 때가 있다. 힘을 가진 자들이 해대는 몹쓸 일이 부끄러운 것은 분노의 감정이다. 나보다 못한 사람 때문에 부끄러운 것은 혐오와 배제의 감정이다. 나는 저 사람들과 다른데 내가 그들처럼 취급받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니고 싶은 욕망이다. 우리에게 분노의 부끄러움은 적고 혐오의 부끄러움은 넘친다.
버스는 오늘도 국경을 넘는다. 승객은 더 이상 나를 의심스럽게 보지 않는다. 이제는 한국의 ‘병세’를 묻지 않는다. 한국의 ‘치료법’을 묻는다. 방법과 요령을 묻는 것이다. 유럽은 매일 스포츠 중계처럼 ‘아시아 바이러스’를 보도했지만, ‘미개한’ 남의 일이라 생각한 탓인지 정작 본인의 준비는 부족했다.
유럽은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이다.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확인해줄 여력은 없다. 증상이 의심되는 사람들이 속출하는데도 그저 집에 있으라고만 한다. 위중한 상황이 되어서야 확인이 가능하니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한다. 불안감을 오롯이 혼자서 견디어내야 한다. 평소 접촉했던 주위 사람들에게는 민망하다. 감염 여부를 묻는 질문에 딱 부러지는 답을 줄 수 없다. 모든 개개인이 스스로 고립하는 방법밖에 없다. 철저한 고립화 전략이다. 정부의 확진자 통계는 그야말로 ‘공식적’ 통계다. 사회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한다. 유럽이 소리 높여 외치던 ‘연대 정신’은 코로나바이러스의 1차 공격 대상이었다. 그리고 쉽게 무너지고 있다.
‘국뽕’도 자화자찬도 아니다. 다른 ‘선진국’의 잣대나 시각으로 자신의 옳고 그름을 말하는 시간은 지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문제를 한국식으로 살펴보고 해결해도 된다는 뜻이다. 바다 건너서 들리는 말들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 저쪽 사정이 우리 사정을 살피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해묵은 바이러스 ‘서양 콤플렉스’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
우리의 싸움은 따로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효과적인 방식이지만, 이 말은 다소 기만적이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둔다고 만들어진 공간은 사실 비워져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때로는 필사적으로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누군가 거리를 메워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리를 둘 수 있다. 그 ‘빈’ 공간은 곧 노동의 공간이다. 식당을 피하고 가게를 피한다고 해서 우리는 위장을 비워두진 않아도 된다. 끊임없이 주문을 받고 신속하게 배달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품격을 높이려는 소비자들의 불만과 항의까지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들 덕분이다. 그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고, 이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키면서 우리가 만들어낸 ‘신종 바이러스’의 감염자다.
콜센터 노동자는 전화기 하나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재택근무를 못 한다. 좁은 사무실에 모여서 동료의 침 샤워를 받으며 일한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쏟아내는 주문을 감당하려고 한뼘의 거리도 없이 촘촘히 붙어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집단감염이다. 감염된 어느 콜센터 노동자는 투잡 생활을 했다. 서울 여의도에서 녹즙을 배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의도 증권가에 비상이 걸렸다. 그의 ‘감염’을 두려워해서 그의 동선을 따졌을 뿐, 그의 ‘노동’을 살피지는 않았다.
쿠팡맨도 쓰러졌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주문량을 필사적으로 감당하려 했다. 화장실 가고 밥 먹는 시간도 줄였다. 대신 남들의 식탁을 위해 물과 쌀을 날랐다. 회사는 몰려드는 주문만 보았고, 소비자들은 문 앞에 놓인 배달물만 보았다. 그 사이에서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쿠팡맨은 마지막 배송지에서 제 목숨까지 저세상에 배달했다.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불가피하게도 경제불황을 부른다. 일자리가 없어지고 월급도 줄어들 것이다. 보호된 일자리와 그렇지 못한 일자리 간의 ‘거리’는 더 커진다. 코로나바이러스를 피하자고 문을 꼭 잠그고 바깥을 내다보지 않으면 다른 바이러스가 더 크게 자랄 것이다. 취약하고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문을 열어 들어오게 해야 한다. 정부도 곳간을 이들을 위해서는 활짝 열어야 한다. 인색한 창고지기 역할을 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왜 바이러스와 싸우는가. 그것이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싸움에서 삶이 위태로워지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 사이에서 퍼지지만 그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만들어진 신종 바이러스는 물처럼 퍼진다. 마치 홍수물 같다. 높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대신 이 바이러스는 낮은 곳으로 흘러 처절하게 적신다. 한치의 틈도 남기질 않는다. 갑작스레 덤벼드는 물벼락처럼, 또는 목 위로 차오는 수조물처럼. 때론 비명도 내질 못해, 이렇게 죽고 나서야 안다. 내가 아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다.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