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규 ㅣ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상임연구위원
재난기본소득의 ‘끝과 끝’
「‘사회적 거리두기’ 대신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세계 곳곳에서 제기된다. 거리두기로 방역이 될지언정 치유가 될 순 없다. 치유는 울력걸음으로 가능하다. 한국선 일찌감치 그 거리를 벌리고자 했고, 또한 일찌감치 연대로 그 거리를 메우고자 한 흔적들이 있다. 마스크 양보, 광주-대구 달빛동맹, 숱한 자원봉사자들…. 연대의 꼭짓점에 ‘재난기본소득’이 목하 자리잡고 있다. 진보개혁 진영 모두 한목소리를 내진 않는다. 이른바 ‘재난기본소득’과 더 오래된 ‘기본소득’ 두 쟁점에 대해 가장 방어적인 논거와, 가장 공격적인 논거를 함께 들어본다. 이번 추경으로 종료될 의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재난이 물러가지 않았다.」
요즘 화두가 재난기본소득이다. 가장 적극적인 방안이 모든 국민에게 100만원씩 주자는 것이다. 이것이 실현되면 4인 가족 기준 400만원의 이전소득이 발생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생계 위협을 받는 실직자, 비정규직 노동자, 자영업자 포함 모든 국민이 2개월분의 최소 생계소득을 얻게 되고 경제도 추가된 유효수요 덕분에 잘 돌아갈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이를 반대하는데, 그 근거는 예산이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방안은 있다. 가령 5000만명에 50조원이 드는데, 민주노총 얘기대로 950조원 대기업 투자유보금의 10%면 이를 충당하고도 남는다.
이 정책이야말로 케인스주의 유효수요 정책이고,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현금 살포의 적실한 방안이다. 왜냐하면 50조원 조달까지 인플레를 낳는 화폐 발행이나 국가 부채를 증대시키는 국채 발행, 국민에게 부담되는 증세가 아닌 재벌 투자유보금의 사용은 이런 부작용이 없는 즉각 실행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재난기본소득’은 침체에 직면한 경제를 살리고 재벌도 이득을 볼 수 있는 좋은 방안이다.
이에 대한 예상 비판은 첫째, 이 방안으로 어떻게 경제가 살아날 것이며 둘째, 재벌의 이득을 어떻게 보장할 것이며, 셋째 이 방안의 부작용으로 자본 유출과 외환위기, 디폴트 우려로 국채 발행 난관, 금리 급등 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으로 우선 ‘세이의 법칙’을 상기할 수 있다. 경제에서 생산과 소비, 공급과 수요가 항상 일치한다는 주장인데, 추상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즉 생산은 소비를 위해 하는 것이고 소비는 생산으로 발생한 소득을 넘어설 수 없으므로 생산과 소비는 일치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에서 생산으로 발생한 소득이 분배된 결과, 분배된 것을 소비하고 남는 사람도 있고 모자라는 사람도 있다. 모자라는 사람은 소득을 모두 소비하기에 문제가 없지만, 남는 사람은 소득을 일부 소비하지 않고 남겨두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런 일은 이번 같은 코로나 사태나 자본주의 위기 이후의 초기 침체 국면에 두드러지게 된다. 달리 말하면 국민 총생산, 총소득(분배), 총소비가 일치한다는 삼면등가의 법칙은 항상 맞다. 여기서 문제는 총생산과 총소득은 실질 생산, 실질 소득으로 바꾸어도 무방하지만, 총소비는 실질 소비와 같지 않다는 점이다. 총소비에는 투자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가 2008년 자본주의 위기 이후 지금까지 완전한 침체도 아니지만 성장도 부진한 뉴노멀에 빠진 이유는, 위기의 근본 원인이던 자본의 고도 축적으로 인해 수익성이 나쁜 구조, 그래서 투자가 안 되는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런 유사 침체 국면을 그대로 두면 축소된 수준에서 균형을 찾는 정체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 이번 코로나 사태는 추가적 침체와 축소된 정체의 악순환을 낳을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유효수요를 제공해 소비의 확대와 생산 확대, 소득 확대의 선순환을 만드는 방안이다.
자본과 노동과 국가가 이런 구조적 조건을 인식하고 타협 방안에 합의하면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한국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가 마찬가지다. 한국이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룬다면 자본 유출이 아니라 유입이 발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이 가장 투자 전망이 밝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세계가 한국을 모델로 삼을 수 있다. 이런 유효수요 정책은 1970년대까지 세계의 보편적 방안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이를 뒤엎었지만 그 한계는 누구나 다 인정한다. 이제 방향을 바꿀 때다. 이렇게 되면 10%의 투자유보금을 잃는 재벌은 나머지 90%를 투자해 장기적으로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이번 기회에 재난기본소득을 상설 보편적 기본소득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도입할 수 있다. 선진 복지국가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50%를 세수로 해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고 있지만, 자본 유출이나 경제 후퇴가 없다. 한국은 세수가 지디피의 28%에 머물기 때문에 20%를 추가할 수 있다. 이 20%는 300조원을 넘는다. 따라서 5000만 모든 인구가 매달 1인당 50만원, 4인 가족당 200만원 이상의 생계소득을 얻을 수 있다.
문제는 20% 증세 방안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와 서민이 추가 부담을 하지 않는 유일한 방안은, 세입 구조에서 부가세와 재산세(누진세 미적용) 같은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세인 직접세로 단일화하되 노동소득뿐만 아니라 자본소득까지 포함한 종합누진소득세를 통해 부자가 부담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자는 소득 창출 능력에 비례해 사회에 더 크게 공헌한 뒤 남은 소득으로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고, 노동자와 서민은 최소 생계를 보장받는 위에서 더 벌기 위해 노력할 수 있고, 경제는 소득 증대, 소비 증대, 투자와 생산 증대의 선순환 궤도를 당분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조건에서도 자본의 수익성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바가 없기에 자본은 주로 낮은 이윤율을 많은 이윤으로 만회하려는 양적 확대 전략을 추구하고, 기술혁신에 성공하는 일부 자본은 높은 수익성을 누릴 수 있지만 이에 동반한 축적 증대 때문에 결국 다시 위기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누릴 좋은 날들을 다시 앗아갈 위기는 끊임없이 축적을 추구하는 자본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결국 자본을 넘어서는 다른 세상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