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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아버지의 가르침

등록 2020-02-27 18:14수정 2020-02-28 02:37

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침대차의 포터였던 윌리엄 마셜과 아내 노마는 미국 해방 노예의 후예였다. 그들은 두 아들의 교육에 큰 힘을 기울여 자식들에게 법치에 대한 존경심을 불어넣었다. 아버지는 교육의 일환으로 법리 다툼이 진행되던 법정에 참관시킨 뒤 자식들과 토론을 벌였다. 저녁 식사 후에는 시사 문제를 놓고 가족 모두가 격론을 벌이곤 했다.

그 맏아들이 흑인 최초의 대법원 판사 서굿 마셜이었다. 아버지는 ‘완벽한 선’을 뜻하는 ‘서러굿’이라 작명했지만 어린 아들은 긴 스펠링을 버겁게 여겼는지 스스로 ‘서굿’으로 개명했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의 그는 학업에 뜻이 없이 동료들을 괴롭히기까지 하며 평범과 불량 사이를 오가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 뒤 법률가로 목표를 정하면서 진지한 학생이 되었다.

인근의 메릴랜드대학교 법대에 가고 싶었으나 원서도 내지 못했다. 흑백 차별이 여전히 횡행하던 20세기 전반에 그곳은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흑인들로 구성된 하워드대학교에 진학했다. 학비 조달을 위해 어머니는 약혼반지와 결혼반지를 저당 잡히기도 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미국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와 연계하여 25년간 법조인으로 활약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한 흑인 학생을 대리하여 메릴랜드대학교에 제기했던 소송이었다. 흑인은 성적이 탁월해도 입학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법률가를 지망하던 메릴랜드주의 흑인들은 사립대학교나 다른 주의 공립대학교로 가야 했는데, 마셜은 그것이 “분리하지만 평등”해야 한다는 이전의 판례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승리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러한 공로들을 인정받아 그는 1967년 흑인 최초의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성공을 아버지의 공으로 돌렸다. “아버지가 나를 법률가로 바꿔놓았다. 그는 논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내가 어떤 진술을 하든 그것을 증명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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