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 4관왕까지 차지했으니 봉준호의 <기생충>은 한국 영화사를 넘어 세계 영화사에서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명작이 됐다. 그런데 <기생충>은 왜 명작일까? 진작 <기생충>이 이토록 엄청난 작품임을 알아챈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영화는 어떤 대목에서 세계인에게 보편적 공감을 불러일으켰을까?
나는 아카데미상 수상 이전에 가족과 함께 <기생충>을 봤는데 클라이맥스 부분에 와서 기택(송강호)이 갑자기 박 사장(이선균)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고서야 아, 이 영화가 심상찮은 물건이구나라는 느낌이 왔다. 그럼에도 대단한 명작이라는 생각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계급 불평등과 삶의 불안 문제를 다루면서도 전형적인 갑(예컨대 재벌 2~3세)과 을(예컨대 비정규직)의 문제는 비켜 간 영화라는 딱한 생각마저 했다.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 격의 없는 벗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겨우 <기생충>의 진가를 알아채게 됐다. <기생충>은 우리 시대 계급 불평등 문제가 훨씬 복잡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사회경제적 균열 양상과 삶의 실상에 더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다.
<기생충>에서 갑인 박 사장은 재벌 2~3세가 아니라 아이티(IT)기업 대표(CEO)다. 갑을 이렇게 설정함으로써 자산 축적과 계급 문제에 능력주의 문제라든가 시장의 시대 무한경쟁의 요소들이 들어온다. 다혜(박 사장 딸)의 과외, 기우(기택네 장남)가 명문대 지망 4수생이라는 사실 등에서도 교육, 학벌의 문제가 끼여 있다. <기생충>은 1 대 99의 균열이 아니라 계급과 능력주의가 결탁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20 대 80의 균열’을 그리고 있다 하겠다.
을이라 해서 같은 을이 아니다. 반지하에서 가족 성원 모두 백수로 사는 기택네와 남편이 박 사장 지하 방공호에 사는 문광·근세 부부는 모두 ‘기생충’ 같은 밑바닥 인생이다. 하지만 결코 ‘같은 불우이웃’이 아니다. 서로 아픔을 공유하지 않고 각자도생을 추구함은 물론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또 근세는 박 사장을 엄청 존경한다. 이는 을들의 연대정치 길이 험난함을 함축한다. 정치적 갈등 차원으로 올 경우 20 대 80 균열론조차 현실과 거리가 멀다.
나는 우리 시대 계급·계층 문제의 복잡성, 불안과 두려움을 탁월하게 그려내 세계인의 공감을 부른 <기생충>의 예술 세계가 불평등 연구의 스타 피케티가 보여주는 현실의 불평등 세계와 소통의 접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피케티의 새 책, <자본과 이데올로기>로 넘어가 보자. 이 책은 이론 틀이 새롭게 업그레이드되었을뿐더러 주류 경제학 틀에서 벗어났다. ‘불평등 체제’라는 새 개념이 제시된다. 이는 “주어진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구조화하기 위한 일련의 담론과 제도적 배열”로 정의된다. 정치적 구조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매우 중시하는데 모든 역사적 불평등 체제에는 이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상응하는 정의론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책 제목이 <자본과 이데올로기>인 이유다. 피케티식 불평등 체제 개념화는 불평등을 자연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 불평등 체제는 정치체제와 재산 체제, 교육 체제, 조세 체제 그리고 그들 간 상호관계를 포괄한다. 사실 불평등 체제 개념은 조절이론가 부아예가 먼저 제시했으며 부아예와 비교해 피케티 개념은 약점도 보인다. 소유권을 권리묶음으로 보는지도 분명치 않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적 지점을 잘 포착하고 있는 듯하다.
피케티는 근대사회를 소유지상주의 사회로 파악한다. 이는 사적 소유권과 그 자본화 권리를 신성시하는 사회다. 당연히 이 사회 아래 빚어지는 불평등도 정당화된다. 피케티는 그것의 역사적 궤적, 즉 출현, 위기, 사회민주적 타협, 그리고 오늘의 ‘초자본주의=신소유지상주의’ 사회의 도래를 분석한다. 하지만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백미는 정치적 갈등의 성격 전환과 그 함의 분석이 아닐까 싶다.
피케티는 교육적 균열선의 역전을 집중해 보여준다. 전후 ‘고전적’ 정당 체제에서 좌파정당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했고, 계급을 가르는 부와 소득과 교육 위계의 세 축에서 약자들의 정당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좌파정당은 약자 정당적 성격이 매우 약화되고 ‘고학력 정당’의 성격으로 변화됐다. 이른바 브라만 좌파(BL)의 출현이다. 브라만 좌파의 경쟁자는 고소득자와 자산 부자를 대변하는 상인 우파(MR)다. 이 ‘BLMR’의 이중엘리트체제는 분명히 지지기반에 차이가 있다. 하지만 기존 불평등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주의를 공유한다. 피케티는 나라에 따라 이중엘리트체제에 다양성이 있다고 말한다.
‘BLMR’의 이중엘리트체제는 불안정하며 분화를 보인다. 브라만 좌파는 더 친시장적 분파와 더 재분배 지향적이고 불평등의 도전에 응답하려는 분파로 분열되고 있다. 상인 우파 또한 친시장적 중도우파와 더 급진적인 반이민-민족정체성 지향 우파로 분열되는 경향이다. 다른 한편 정치혐오 현상이 심화될 수도 있다. 이는 지배엘리트에 유리할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선거 정당성, 정치체제의 정당성을 훼손하며 나아가 권위주의 통치를 낳거나 과격한 혁명을 부를지도 모른다.
정치 균열 구조의 거대한 전환에 대한 피케티의 진단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냉전반공분단체제 이래 다중 적폐가 낳은 한국 정치의 예외주의적인, 보수적 성격 때문에 전환이 지체되고 있을 뿐이다. 한국 불평등의 현실은 사실 <기생충>의 세계보다 훨씬 후지다. 한국 정치에는 사민주의의 브라만화는 없었다. 우리는 ‘평등 없는 자유주의의 브라만화’와 브라만 중도파(또는 강남중도파)에 대해 말해야 한다. 조국 사태는 이를 압축해서 보여준 분기점의 의미를 가질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브라만 중도파의 지향은 닫힌 불평등 능력주의만이 아니다. 이 정파는 국정농단 주범과의 밀월 행각에서 보듯 불공정한 수저세습주의와 기꺼이 동거한다. 또 주거권 보장은 밀어내고 불로소득 자산계급의 이해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세심하게 노력하고 배려한다. <세습 중산층 사회>를 쓴 조귀동은 한국의 정당 구도를 60대 건물주의 정당 대 50대 부장님의 정당으로 비유했지만, 이 비유조차 둘의 보수적 공유 지점은 빼놓은 듯하다. 내일의 한국에서 누가 일자리·주거·교육 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을까. 수년 내 대규모 탈민주당 유권자 집단이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조귀동의 진단이다. 샌더스가 부상하고 있는 미국과는 딴판이다. 물론 당장 4월 총선이 문제다.
코로나19 재난 국면에서 우리 사회의 근원적 회복력이 시험받고 있다. ‘재난 극복 뉴딜’ 같은 위기 극복책이 나오면 좋으련만. 유레카!
이병천 ㅣ 강원대 명예교수·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