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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혐오를 멈추는 법을 이젠 배우자

등록 2020-02-27 18:14수정 2020-02-28 09:30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지난해 5월7일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시 공무원 17명이 ‘서울시의 다수 공무원들은 서울광장 퀴어행사를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 및 서울시에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광장사용 신고를 반드시 불수리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청했다. 5월9일에는 서울시 행정포털 자유게시판에도 글을 올렸다. 언론은 일제히 기사를 쏟아냈고 5월10일에 한 서울시민이 참다못해 공무원 17명의 행동이 차별 행위라고 서울시 인권담당관에게 고발했다. 그리고 몇달이 흘렀고 해가 바뀌었다. 이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지난 24일에 이 사건에 대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의 결정문이 마침내 나왔다. 2019년 12월20일에 이미 판단은 내렸지만 최종 결정문 작성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두 달이 지난 뒤에야 민원인의 손에 전달이 되었다. 나도 민원인이 누군지 그동안 알 수 없었으나 결정문이 나오자마자 그분이 보내주신 덕에 이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결정문을 보니, 17명의 서울시 공무원은 40년간 매주 1회 정기예배와 기도회를 열어온 종교모임의 회원들이다. 그들은 성소수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방예의지국이 서구의 음란한 행사를 무조건 따라할 필요가 없으며, 서울퀴어문화축제가 건전한 시민문화와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서울광장에서 개최되는 것을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는 이들의 성명서가 편견과 왜곡을 바탕으로 “성소수자의 인격과 존엄을 훼손하고, 성소수자를 사회에서 예외적 존재로 취급하도록 하여 사회참여의 기회를 박탈하려고 하는 차별·혐오표현을 한 것으로 대한민국 헌법 10조 및 국제인권규범을 위반한 인권침해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겨우 17명인데도 다수의 공무원을 대표하는 양 자신들의 성명서를 ‘서울시의 보도자료 형식을 차용’해서 언론에 배포하여 기사화되도록 한 점, 서울시 공무원의 대다수가 퀴어문화축제를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허위주장을 유포한 점, 성소수자 행사는 음란하고 퇴폐적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근거없이 단정짓는 표현을 반복하여 시민들에게 ‘성소수자의 퀴어문화축제는 음란하고, 나아가 성소수자 집단은 음란하다’는 인식을 주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유발하고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한 점 등을 지적했다.

서울광장은 시민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하지만 광장의 관리 주체는 서울시다. 언제든 이 업무에 직간접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공무원들이 이런 성명서를 내는 것은 그 자체로 공정한 공무집행을 기대할 수 없게 한다. 심각성을 파악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는 해결책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두 가지를 주문했다. 서울특별시 공무원들의 공무수행과 관련하여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발생하지 않도록 혐오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서울특별시 공무원 복무조례’를 개정하여 차별 및 혐오표현 금지 조항을 신설하라는 권고다. 서울시가 이 권고를 진지하게 이행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앞에서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지 않는가. 만약 한국 사회가 조금 더 일찍부터 차별과 혐오를 허용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기반을 가졌더라면 폐쇄병동에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이렇게 많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스부터 반복되는 전염병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데 익숙해졌을 것이다. 함께 살아온 공동체의 일원을 슈퍼전파자로 지목하고 반목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정치가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혐오에 기생하며 상호비방의 대립만 하는 꼴을 안 봐도 될 것이다. 항상 질환보다 더 사람을 많이 해치는 것은 혐오와 배제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세상에서는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제발 이제는 혐오를 멈추는 법을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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