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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감기에 걸려도 일해야 하는 사회

등록 2020-02-25 18:41수정 2020-02-26 09:31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북미와 유럽 많은 나라의 유치원에서부터 가르치는 것 중 하나가 기침 예절이다. “모든 기침은 팔꿈치 안쪽으로!”라고 가르친다. 감기가 유행하는 시기에는 팔꿈치나 팔뚝에 손수건을 감고 다니는 아이들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예절이 자리잡게 된 데에는 중세 시대 페스트 등 대역병으로 인구의 절반 정도가 사망한 뼈아픈 경험들이 영향을 끼쳤다. 중세의 경제·정치를 지탱하던 장원 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해방된 농노와 실직한 기사와 몰락한 영주들이 몰려와 근대적 의미의 도시를 처음 형성하던 무렵, 도시 인구의 절반 이상은 직업이 없는 날품팔이 대중이 차지하고 있었다. 중세 말이 시대 배경인 서양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남루한 누더기를 걸치고 도시의 광장이나 뒷골목을 배회하는 무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주거 형태는 현대의 돼지우리를 연상할 만큼 열악했다. 좁은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비위생적 환경이 역병의 급속한 대규모 전염을 초래한 주요인이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사람이 밀집한 공간에서 기침하는 행위에 대한 경계심이 각인됐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조금이라도 아픈 기미가 보이는 직원이 있으면 상사나 동료들이 조퇴를 종용하는 풍조는 그렇게 형성됐다. 그러한 제도가 정착되려면 무엇보다 조퇴하거나 결근한 직장인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역시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가 강타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짐작하기 어려운 상황이 돼버렸다. 노동문제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다. 우리나라 병원 노동자들의 1인당 담당 환자 수는 평소에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인데 지금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몰려드는 상황에서 일하고 있을 병원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가혹할 것인지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해 죽어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한가하게 노동조건이나 이야기할 때인가”라고 비난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으로도 5~6년 주기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감염병 사태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병원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정상적으로 유지·개선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013년 경상남도가 적자 누적과 ‘강성 노조’라는 합당하지 않은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강제 폐쇄한 것이 당시에는 수많은 병원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노동문제’로 부각됐지만 지금에 와서는 경남 전역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진주 지역에 대형 지역거점 공공의료시설이 없다는 심각한 공공의료 인프라 파괴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코로나19 감염자뿐 아니라 다른 질병에 걸린 환자도 제때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병원을 찾지 못해 심각한 손상을 입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건강을 담당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사회 구성원이 모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 사건 등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하자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일었을 때, 경영계 입장을 대변하는 경제 언론은 ‘산업재해 없애자고 공장 다 문 닫게 할 건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바이러스 감염 지역 못지않게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면서도 그렇게 말했다면 정말 비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도 경제 언론은 중국 등 외국에서 한국산 마스크 구매 요구가 폭증하는데 우리나라 기업들은 ‘주 52시간제’에 발목이 잡혀 막대한 생산 차질을 빚고 있다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정부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마스크 및 손소독제 제조업체 등에 지난달 14일 기준으로 모두 57건의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했다. 그동안 ‘재해·재난’에만 허용해왔던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에 ‘업무량 폭증’ 등 경영상 사유를 추가한 새 시행규칙이 적용된 지 2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업무량이 폭증하면 기존 노동자들에게 초과노동을 시킬 것이 아니라 임시직 노동자를 더 고용하는 것이 사회에 더 유익한 해결 방식이다. 기업이 감당해야 할 노동비용을 마땅히 지출해야 나라 경제도 성장한다.

감기에 걸린 채 출근한 노동자에게 성실하다고 칭찬하는 사회와 쉴 것을 권유하는 사회 중 어느 곳에서 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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