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지난 주말 20대를 함께 보낸 지인들이 십여년 만에 모였다. 고3 학부모 노릇에서 해방된 이들이 여럿이라 자축을 겸한 자리였다. 역시나 화제는 교육으로 모였다. 아이 둘을 의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축하와 부러움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아이를 이른바 스카이대에 보낸 친구에게는 비법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특목고, 의대와 스카이 진학, 사교육, 강남 이사, 미국 유학 등 중상층 학부모들에게 어울릴 법한 화제가 한참 오갔다. 지인들은 대부분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대학 때는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고 그 뒤에도 나름 진보적으로 살아온 이들이었다.
나 자신 무자식이 상팔자라서인지 자녀 교육에 과몰입하는 세태가 불편하다. 밖에서는 불평등을 비판하고 빈곤의 대물림을 가슴 아파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면 제 자식은 일류로 키우려다 결과적으로 불평등에 일조하는 86세대, ‘강남좌파’의 이중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중성을 나무라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이 시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쏟는 과도한 투자에는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률이 70%가 넘고 경제는 구조적 저성장에 처했다. 고용과 소득이 안정된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수록 그중 명문대 출신의 비중은 는다.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으로 출발해서 대기업, 정규직으로 상향 이동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첫 일자리가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 고용이 신분이 된 사회에서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온갖 투자와 노력을 다하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자 의무일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는 지식기반경제 구축을 명분으로 교육에 대한 투자가 지고의 가치로 부상했다. 아이엠에프(IMF) 시기와 겹친다. 사람을 노동이 아니라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으로 보는 인적자본론의 관점이 보수는 물론 진보 정권도 사로잡았다. “사람에게 투자하자”는 슬로건이 진보적 개인들도 사로잡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무한 투자가 사회적 정당성도 얻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부모의 열망은 존중할 만하다. 그 열망은 자녀를 안정된 지위와 교양을 갖춘 ‘좋은 시민’으로 키우기 위해 어릴 때부터 독서와 예술,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지원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투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결과 물적 자본처럼 인적 자본도 세습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학력에 따라 교육 투자가 달라지고 자녀의 대학, 일자리도 영향을 받는다. 자산은 물론 재능마저 세습된다. 이제 교육은 계층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계급고착화의 기제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실증연구들이 이를 입증해왔다. 미국의 진보적 연구자 리처드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시장에서 인정되는 능력이 계급에 따라 불평등하게 육성되고 있으며, 학력과 경제력을 갖춘 상위 20%가 ‘기회를 사재기’한다고 꼬집었다. ‘부모 찬스’ 없이 좋은 인턴 자리 구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중상층 자녀들이 교육을 매개로 안정적으로 계층을 잇게 되는 사회에서는 설령 진보적인 부모들일지라도 재분배와 사회안전망 정책에 절실할 이유가 없다. 가난한 아이들이 경험하는 직업의 불안정성, 비정규직과 파견을 전전하는 삶은 다른 세계의 일이기 때문이다.
중상층 부모들의 교육 투자는 이렇게 나름의 합리적 명분과 근거 위에서 강화되고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사회적 합리성과 충돌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출발부터 핸디캡을 씌우는 불공정한 사회, 패자 부활의 기회도 없고 상향이동의 가능성도 낮은 사회의 미래는 음울하다.
두달 뒤면 총선이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기회의 공정함과 출발의 평등을 내세워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하지만 작년 가을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이 약속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다. 청년들은 자유한국당이 상위 1% ‘건물주의 정당’이라면, 민주당은 상위 20% ‘부장님의 정당’이라며 비아냥댄다. 개인의 합리성을 제어해 사회적 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진보를 표방한 정당의 소명이다. 부모가 누구든 출발만은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최소한의 가치다. 이번 총선은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정책을 위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절박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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