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8번째 신종 코로나 확진 환자가 발생한 광주21세기병원에서 5일 오후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들이 병원에 격리됐던 일반 환자들의 병실을 옮기기 위해 논의하고 있다. 광주/ 연합뉴스
현실도 크게 다르진 않다. 단지 영화 속의 종교적 선동을 정치적 선동이 대체할 뿐이다. 정부는 며칠 전, 최근 2주 이내에 중국 후베이성을 방문한 외국인 입국을 일시 금지하는 대책을 내놨다. 특정 지역의 여행객 입국을 막는 건 세계보건기구(WHO)의 전염병 대응 수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일본·러시아 등이 비슷한 조처를 취했고, 특히 미국이 우한뿐 아니라 중국 본토의 여행객 입국을 일시 금지하는 초강경 대책을 내놓은 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인간이 새로운 질병, 특히 ‘신종’ 전염병에 훨씬 큰 두려움을 갖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어떻게 대응할지 알지 못하고, 상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으리란 불안감이 두려움을 키운다. 2003년 사스(SARS), 2014년 에볼라가 그랬듯이, 지금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바로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공포’와 ‘차단’이 전염병을 막는 최선의 방책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바이러스를 잡는 건 의학의 임무지만, 공포와 불안을 진정시킬 책임은 정치에 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거꾸로 간다. 공포에 편승할 뿐, 잠재울 노력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중국 전역을 방문한 모든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제한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도 “입국금지 대상을 광저우 등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코앞인데, 대중의 정서를 거스르기 힘든 건 진보든 보수든, 한국이든 미국이든 다르지 않다. 2014년 에볼라 사태 때 미 연방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뉴욕 등 상당수 주에선 독자적으로 아프리카 입국자를 강제 격리시키는 강경 조처를 실시했다. 그해 11월 중간선거가 끝나자 강제격리 조처는 슬그머니 사라졌다.
날이 갈수록 권위주의, 패권주의로 치닫는 중국의 시진핑 체제가 초기 감염병의 정확한 평가와 대응을 어렵게 해서 사태를 키웠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중국 정부는 초기 대응 실패가 어쩔 수 없었던 일이 아니라, 사안을 축소·은폐하는 데 익숙한 고질적인 폐쇄성에서 비롯했음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에 사과하는 게 옳다. 그러나 이것이 우한에서 고통받는 수백만 중국 시민에게 격려와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매국노’라고 욕하는 걸 정당화하진 못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전염병 대응 매뉴얼이 가장 강조하는 게 ‘인권과 존엄, 기본권의 존중’이란 사실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중국에 마스크 100만개를 몰래 갖다줬다’고 정부를 맹비난하는(물론 이것도 사실과 다르지만) 야당의 모습에서 공포와 차별을 부추긴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건 안타깝다. 우리가 기침하는 중국인을 손가락질하는 것이나, 손흥민의 기침이 영국 관중의 조롱을 받는 것이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이런 행동이 혐오와 분노의 감정을 발산하는 데는 유효할지 모르지만, 바이러스 확산을 막고 치유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을 주질 못한다. 가장 효과적인 전염병 대처는 차단이나 폐쇄가 아니라, 정확한 정보 공유와 국가 사이 협력이라고 국제보건규약(IHR)은 제시하고 있다.
지난 세기 인류가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건 과학과 의학의 진보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인터내셔널리즘의 확산이 ‘국제 협력과 공조’로 전염병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걸 가능하게 했다.
이제 세계는 달라졌다. 2014년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에 3천명의 군 병력을 보내 의료활동을 도운 미국이 이번엔 모든 중국 여행객의 입국을 금지하는 가장 강력한 봉쇄책을 택한 건 상징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한 게 분기점일 것이다. 앞으로 세계적 유행병은 더 자주, 더 독하게 찾아올 텐데 국제사회 협력이 약해지는 건 몹시 우려스럽다. 우리도 그런 흐름에 올라탄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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