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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새해 다짐의 규격

등록 2020-01-28 18:10수정 2020-01-29 12:44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인천시립박물관 ‘메이드 인 인천’ 전시의 일환으로 마련된 노동자 박남수와 가수 이지상이 함께하는 콘서트에 참석했다. 박남수씨가 해고당한 뒤 오랜 투쟁을 거쳐 9년 만에 복직하면서 물려준 노동상담소에서 내가 23년 동안 일했다. 그 경력을 바탕으로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니 박남수 선배가 없었으면 오늘의 나는 없었다. 그러한 인연을 맺은 선배가 집 가까운 곳에서 행사를 한다는데 가보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다.

박남수씨가 “지금 저기 앉아 있는 하종강 교수가 그때 일꾼노동상담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내 해고사건 재판서류 작성을 많이 도와줬어요”라고 말해서 잠시 몸 둘 바를 몰랐는데 갑자기 찬물을 끼얹는 얘기가 이어졌다. “그때 하종강씨가 사건 내용을 보고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해고당해서 속이 타는데, 그걸 보고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그날의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새벽녘이 돼서야 상고이유서 작성을 다 끝냈는데, 혹시라도 선배가 미안해할까 봐 ‘사건 내용이 무척 재미있어서 나한테는 전혀 힘든 일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오해로 비롯된 섭섭한 마음을 선배는 38년 동안이나 가슴 한구석에 박힌 참숯처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추억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가 하종강씨에게 내 일을 물려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 하종강 교수처럼 한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룩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그 오해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내가 ‘개판’으로 살아서 선배를 크게 실망시켰다면 그 오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하종강이란 사람은 해고당한 노동자 마음 하나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돼먹지 못한 인간이라고 증명하는 일화로 남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 삶에는 이렇다 하게 내세울 만한 큰 족적이 별로 없었다.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을 뿐이다. 가끔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 정답은 없다. 청소년이나 교사들이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청소년·교사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더 잘 알기는 어렵다. 그것을 자신 있게 가르치려 드는 사람은 오히려 신뢰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일을 찾을 것이 아니라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다. 사람들은 때로 가장 중요한 일을 찾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나머지 정작 소중한 작은 일들을 놓치기도 한다. 작은 실천들이 오랜 세월 꾸준히 쌓이면 결국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된다.

설 연휴 기간에 언론을 통해 접한 연말연시의 세상 풍경은 흉흉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관련해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들은 종말론의 ‘말세’를 방불케 했고 감염·사망자 통계 수치는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조차 꺼린다는데, 설 명절에도 집에 가지 못한 채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노동자들과 한국마사회 고 문중원 기수의 유가족들은 광화문 길바닥 위에서 합동 차례를 지냈다. 설날 단식농성 열흘째를 맞은 톨게이트 수납원 노조 도명화 지부장은 명절에 집에 가지 않고 천막을 사수하겠다고 남은 동지들이 고마워 조합비로 맛난 저녁을 사 먹으라고 했더니 “굶고 있는 지부장도 있는데 열나 좋아한다”며 농담을 했다. 고 문중원 기수의 부인 오은주씨는 “설 전에 장례를 치르고 남편을 차가운 길에서 옮겨 따뜻한 곳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마사회가 여섯명의 죽음을 나 몰라라 했지만 일곱번째 남편의 죽음은 절대 그렇게 놔두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며 결의를 다졌다.

방학 기간 교원 연수에서 만난 선생님은 “18년을 일했지만 제자 중에 과학자·변호사·의사가 된 친구는 아직 없거나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꿈을 꾸었던 친구들은 좌절감을 맛보며 현 직장에 다니고 있겠죠. 이거 누가 잘못한 걸까요? 제 잘못이죠. 나를 거쳐 간 제자들의 90퍼센트는 노동자로 살아갈 텐데 나는 왜 꼭 관리자로서 필요한 역량만 강조했을까?”라며 우리 교육 현실을 개탄했다.

기후위기 시대 자신들을 스스로 ‘멸종위기종’이라고 부르는 청소년들은 정부와 기업에 기후위기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수업을 거부하면서까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과 결합할 수 있는 작은 과제들을 찾아 꾸준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을 찾는 것보다 더욱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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