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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역사주의 이전의 역사주의자들

등록 2020-01-16 17:55수정 2020-01-17 02:35

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여느 개념어와 마찬가지로 역사주의라는 단어도 주장하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동의가 이루어져, 그것은 모든 현상을 역사적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 하며, 그 과정에서 법칙의 확립을 추구하는 자연과학과 달리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실의 특수성을 천착하려는 경향이라고 본다. 그것은 19세기 후반에 딜타이, 리케르트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정리되기 시작한 뒤 20세기에 들어 크로체와 마이네케 같은 역사철학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그런데 도널드 켈리라는 미국의 역사가가 <현대 역사학의 기반>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주의’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던 16세기에 이미 프랑스의 법학자들이 역사주의의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평생을 지성사와 사학사의 연구에 몰두하여 수많은 업적을 산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제지성사학회의 회장까지 역임했던 학자의 치밀한 연구 결과였다. 그는 기욤 뷔데, 안드레아 알차토 등 이른바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법학자들의 업적을 파고들면서 그런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무림은 깊고 고수는 숨어 있다. 그 법학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추적해보니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또 다른 인물이 드러난다. 바로 프랑수아 오트망이다. 그는 로마법학자였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법전>을 비판하면서 그것은 단지 법학자들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그들의 해석만을 법의 논거로 삼았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법은 토착 프랑스인들인 갈리아인들의 경험에 맞추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대표작 <프랑코 갈리아>의 논지였다. 전통에 의존하던 로마법학자들은 단지 절대주의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목적만 갖고 있었을 뿐 그들에게 역사적 근거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 그는 개신교도로 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은 박해를 피해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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