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ㅣ 중앙대 교수·독문학
2019년은 가히 ‘청소년의 해’라고 불릴 만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파격적으로 16살 소녀 그레타 툰베리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고, 표지에 ‘청소년 파워’(youth power)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난해 세계의 청소년들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임을 증명해 보였다. 툰베리를 선두에 세우고 거리로 몰려나와 생태 문제를 국제적인 의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툰베리가 점화한 청소년 파워의 불길이 올해는 한국에 옮겨붙었으면 좋겠다. 그가 미래의 재앙과 불안을 겨냥했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현재의 고통과 좌절을 겨눠야 한다.
2020년은 한국에서 청소년 파워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억압받는 한국 청소년이 마침내 정치적 발언권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선거연령이 18살로 낮아진 올해를 기점으로 한국 청소년들도 자신의 권리를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정치적 주체로서 거듭나야 한다.
한국에서 청소년 파워가 살아나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청소년들이 너무도 불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 남은 ‘마지막 노예’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표가 그들이 처한 절망적 상황을 폭로한다. 대한민국은 모두가 알듯이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 자살이 청소년 사망 원인 1위이며, 청소년 셋 중 하나가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있다.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를 다투고, 매년 5만~8만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는 나라이다.
대한민국 100년의 과거를 돌아봐도 청소년은 행복한 적이 별로 없다. 30년 일제 통치는 아이들을 ‘황국신민’으로 키웠고, 40년 독재정권은 ‘반공투사, 산업전사’로 길렀으며, 30년 민주정부조차 청소년을 그저 ‘인적 자원’ 취급했다. 청소년은 시대의 요구에 맞춰 제국주의, 국가주의, 신자유주의의 도구로서 훈육되었다. 단 한번도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받은 적이 없다.
2020년은 ‘백년 노예’를 해방시킬 최적의 기회이다.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이 시작되는 뜻깊은 해에 18살 청소년에게 선거권이 쥐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청소년들도 새로운 정치적 권리를 바탕으로 자신들을 노예처럼 훈육해온 교육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학생 인권과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살인적인 경쟁교육은 공감하는 연대교육으로 바꿔야 하고, 학생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학교문화가 정립돼야 한다.
18살 선거권의 의미는 참으로 크다. 그것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며, 학습노예 상태에 놓인 학생들을 해방시킬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등학생이 투표권을 갖게 되는 이 새로운 제도는 학교에서 정치교육이 시작되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교실의 정치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18살 선거권에 반대하며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폭넓게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교실의 정치화는 우려할 일이 아니라 환영할 일이다. 교실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쳐야 성숙한 민주사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수준 높은 정치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정치교육, 즉 민주시민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성숙한 민주사회를 두려워하는 자는 누구인가. 친일, 독재의 역사를 계승하는 반민주 수구세력이다. 그들이야말로 교실을 ‘파쇼의 선전장’으로 만든 장본인들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강제로 외우게 하고, 학교를 군사훈련장으로 개조한 자들이다. 그들이 진실로 두려워하는 것은 교실의 정치화가 아니라 학생의 정치적 성숙이다. 파시스트는 무지와 미성숙을 먹고 자란다.
민주시민교육은 학생의 의식화가 아니라 성숙화를 목표로 삼는다. 학교는 탈정치의 공간이 아니라 성숙한 정치를 가꾸는 묘판이 되어야 한다. 교실은 전체주의의 훈련장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산실로 거듭나야 한다.
학생을 억압에서 해방시킬 이는 학생 자신이다. 인류의 역사는 해방의 역사였고, 모든 해방은 자기해방이었다. 여성 해방은 여성이 이룬 것이고, 흑인 해방은 흑인이 거둔 것이다. 소르본대학을 정점으로 한 대학 서열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었고, 정교수 독재의 대학 권력을 뒤엎은 것은 독일 대학생들이었다. 고통받는 자가 저항하고, 저항하는 자가 해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