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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탄희의 공감(公感)] 대법관이 판사들 ‘승진 코스’인가

등록 2020-01-12 17:59수정 2020-01-13 09:22

이탄희 ㅣ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50대 후반, 남성, 소년등과, 첫 직업: 판사, 현 직업: 판사, 그밖에 직업적 경험: 없음

김명수 대법원장이 조만간 제청할 대법관 후보자의 스펙이다. 최종 후보자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한데 나는 무슨 재주로 벌써 아는 걸까.

지난 목요일, 새해 첫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열렸다. 4명의 후보가 추천되었다. 4명 모두 50대 후반이다. 4명 모두 소년등과를 했다. 4명 모두 고등법원 부장판사다. 4명 모두 평생 판사만 했다.

4명 중 한명이 곧 대법관이 된다. 4명에게는 중요하고 떨리는 순간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별로 그렇지가 않다. 누가 되더라도 큰 차이가 없다. ‘평판사-부장판사-고등법원 부장판사-대법관’이라는 법원 내 승진 도식의 되풀이일 뿐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당시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를 약속했다. 취임사에 아예 못 박아 두었다. 하지만 임기 4년째, 그동안 그가 제청한 대법관의 6분의 5가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이다. 법원 내부 승진이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대법원장이 약속한 다양화가 아니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는 왜 중요한가. ‘다양한 사회적 경험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재판을 지배하는 것은 판사고, 판사를 지배하는 것은 경험이다. 경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미국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판결은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낙태죄 판결’이다. 이 판결로 미국에서 낙태죄가 원칙적으로 폐지되었다. 100년 된 제도가 없어졌다. 캐나다 신문 <내셔널 포스트>는 이 사건을 20세기 최고의 판결로 꼽았다. ‘프라이버시권’을 인정한 판결로 전세계 헌법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

판결을 주도한 사람은 해리 블랙먼이다. 그는 로펌, 교수, 병원 사내 변호사, 판사 등을 거쳐 대법관이 되었다. 보수파인 공화당 닉슨 대통령이 지명했다. 블랙먼은 예상을 뒤엎고 ‘낙태 여부는 여성이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에겐 숨겨진 경험이 있었다.

블랙먼에게는 딸 셋이 있었다. 둘째 딸 샐리는 성적이 좋아 일찍 대학에 진학했다. 만 19살이 되던 해,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낙태죄 판결 이전이었다. 샐리는 고민 끝에 상대방과 결혼했다. 만 20살의 대학생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3주 뒤, 그녀는 아이를 유산했다. 운명의 장난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일단 가정주부가 되기 위해 학업을 중단했다. 결혼은 6년 만에 파경으로 끝났다. 25살이 된 샐리는 유산과 이혼의 경험을 안고 혼자가 되었다.

과거 전통적인 성역할에 충실하게 살아온 남성에게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처지에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다. 1900년대 중반 미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랬다. 피부에 와닿는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텅 빈 마음의 창고를 아무리 뒤져도 풀풀 날리는 먼지뿐이다. 그래서 그 심리적 공백을 수정란의 운명에 몰입하는 것으로 채우기 쉽다. 하지만 블랙먼은 딸아이의 기구한 운명을 함께 경험했다. 그 경험이 그에게 영감을 줬다. 다른 사고를 하도록 이끌어줬다. 새로운 경험과 사고는 토론을 통해 동료 대법관들에게 공유되었다. 그의 견해는 결국 다수의견이 되었다. ‘다양한 사회적 경험’이 발휘하는 힘은 이런 것이다. 신이 노아의 방주에 모든 종을 태우라고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우리 대법원에도 이런 힘이 깃들길 바란다. 사회 곳곳의 다양한 경험이 대법원의 울타리 안에 공유되기를 원한다. 갑과 을과 병의 처지가 동료 대법관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세대, 성별, 직업적 이력, 경제적 계층 등 사회적 경험의 징표가 다양한 사람들로 대법원을 채워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직업적 이력이다. 우리는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직장생활 과몰입’ 사회이고, 직업이 곧 사회적 정체성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대법관 13명이 있다. 그중 11명은 첫 직업이 판사다. 9명은 평생 판사만 했다. 평생 같은 기관에서 동료로 지내오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거쳐 대법관으로 ‘승진’했다. 대법관 구성이 획일화된 셈이다. 동질감을 바탕으로 집단행동을 하기도 한다. 2018년 사법농단 조사 당시 ‘대법관 일동’이라는 이름으로 입장문을 낸 적도 있다. 선진국 대법원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기 중 제청할 대법관은 6명이 더 남았다. 임기가 시작될 때 많은 사람이 ‘새로운 대법원’을 꿈꿨다. 그 꿈이 일장춘몽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대법관은 판사들의 승진 코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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