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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야트막한 언덕 풍경

등록 2020-01-02 18:26수정 2020-01-03 02:35

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업적으로는 누구라도 찬란했던 예술 작품들을 꼽는다. 반면 그 시대의 지적 성취도 만만치 않은데, 밑바탕에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동의가 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일 뿐 ‘휴머니즘’에 대해 말하라면 대략 예닐곱 개의 정의가 경합을 벌인다. 하지만 크게 보면 대립하는 두 학파의 주장으로 결국 환원된다. 하나는 휴머니즘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그것을 지식인들의 집단 이익을 증진시키려던 활동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그것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공공선을 모색하려던 운동으로 본다.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학파의 거두이다. ‘후마니타스’라는 말이 처음 태어났을 때 그 말 자체가 단지 ‘학문’을 뜻했으니 그것을 ‘인본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채색하는 것은 당시의 용례를 몰라서 나온 소치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20세기 전반기에 고국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탄탄한 실력을 갖추었다. 이후 파시즘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뒤 예일을 거쳐 컬럼비아에 정착했다.

플로티노스나 피치노처럼 당시까지 미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지식인들의 사상을 소개한 것도 큰 기여이지만, 크리스텔러의 가장 큰 업적은 <이탈리아의 길>이다. 전 세계의 도서관이나 수장고에서 발굴한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수고를 집대성한 방대한 자료집이다. 이전까지는 분류조차 되지 않았던 자료들로, 그의 작업은 이후 연구의 양과 질을 크게 격상시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가조차 르네상스 철학이 철학사에서 받는 푸대접을 느꼈다. 철학사에서는 중세와 계몽주의라는 고봉만을 볼 뿐 중간의 르네상스라는 낮은 언덕은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항변한다. 언덕이라도 주변보다는 높아 볼만한 경관을 제시하며,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이어지는 경로를 안내해준다는 것이다. 생각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그 야트막한 풍경은 필요하다고 덧붙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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