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윤희는 공장의 급식소에서 일하는 조리원이고 남편과 이혼했다. 새봄은 윤희의 하나뿐인 딸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새봄은 우편함에 일본에서 온 편지를 발견한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것 외에는 세상과 거의 단절하다시피 살아가고 있는 엄마에게 온 편지라니. 새봄은 편지를 몰래 뜯어본다. 일본의 오타루에 살고 있는 엄마의 옛 친구가 20여년 만에 보낸 안부 편지였다. 새봄은 궁금하다. 엄마에게 그런 애틋한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새봄은 이런 증거들만 가지고도 엄마와 일본의 편지 주인공 사이의 감정이 ‘깊은 그리움과 말하지 못한 사랑’이란 걸 눈치챈다. 편지를 못 본 척 다시 우편함에 넣어놓고 윤희에게 대학 가기 전 모녀끼리 해외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마치 엄마와 옛 친구를 만나게 하기 위해 딸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한 듯이.
이런 윤희와 새봄의 이야기는 영화 <윤희에게>에 담겨 있다.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자, 가장 뛰어난 퀴어 영화에 주는 ‘퀴어카멜리아’ 수상작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나는 이 영화의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 사회를 맡았다. 어느 관객이 질문했다. 새봄은 남자친구가 있는 이성애자인데 어떻게 동성 간의 사랑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냐고. 영화를 만든 임대형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사랑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다른 사람의 사랑도 소중한 걸 알지 않을까요? 저는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이성애를 한다는 것이 곧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일 필요는 없다. 선천적으로 동성애 혐오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혐오와 편견은 학습의 결과일 뿐이다.
오타루에 사는 윤희의 옛 친구는 쥰이다. 쥰은 그동안 참고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될 때마다 윤희에게 편지를 썼다. 하지만 한 번도 부치지 않았다.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은 쥰에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어느 날, 쥰과 함께 사는 마사코 고모는 우연히 부치지 않은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한다. 마사코는 망설이다가 몰래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버린다. 마치 세상을 한참 더 먼저 살아온 사람으로서 쥰에게 삶이란, 눈이 그치길 기다리는 순응이 아니라 눈이 언젠가는 그친다는 믿음이란 걸 알려주려는 듯이.
이 영화의 미덕은 용기를 강자에 맞서 약자가 가져야 할 태도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이 어느 한쪽의 용기로만 변할 리가 없다. 열아홉살의 윤희는 처음 용기를 내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말했었다. 하지만 축복 대신 부모에 의해 정신병원으로 끌려가야 했고, 오빠의 친구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다. 사랑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경험해 본 사람은 사랑을 뺏긴 후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자기 자신을 벌주는 심정으로 평생을 살아가도 가까운 이들은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윤희가 어떤 용기를 더 낼 수 있을까. 아니, 왜 윤희만 용기를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나을지 모르겠다. 용기는 약자의 몫이 아니고, 필요한 건 강자의 관용이 아니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용기는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지켜볼 수 있는 용기다. 열아홉살 시절 윤희의 용기는 이십여년이 흘러 열아홉살의 새봄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새봄의 용기는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살던 윤희에게 다시 오롯한 자신으로 살아갈 용기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용기를 글로 전할 수도 있다면, 2020년, 새해의 소원을 빌고 덕담을 나누는 시기의 이 지면을 빌려 이 땅의 모든 ‘윤희’와 ‘새봄’에게 보내고 싶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를. 당신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다. 다른 이의 사랑을 존중할 용기를,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비난하지 않을 용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서로의 곁에 머물러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날 때부터 가졌던 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지 타인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