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정 ㅣ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바쁜 가운데서 한 가로움을 얻으려면 먼저 한가한 때에 그 마음의 자루를 찾아들 것이요, 시끄러운 때에 고요함을 취하려면 먼저 고요한 때에 그 줏대를 세워두라. 그렇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 움직이고 사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채근담의 경구를 인용할 필요도 없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여는 참에 되돌아보고, 내다보자. 바쁘지 않을 때 마음의 중심을 잡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가? 큰 난리가 일어나지 않고 있을 때 대한민국의 줏대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가? 오히려 주변의 잡음에 정신이 팔려 중심을 놓치지는 않았던가?
북이 공언했다던 ‘크리스마스 선물’은 없었다. 한국에서는 숱한 전문가들이 선물이 무엇일지, 언제 줄지 분석하느라 바빴지만 공허한 말놀음이었을 뿐이다. 미국은 적어도 22차례 정찰기를 동원해 선물을 한시라도 먼저 확인하려고 분주했지만 헛수고를 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에 헛물을 켠 이들은 이제 ‘새해 선물’을 두고 다시 바쁜 행보를 보인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때에 이렇게 바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어느 순간 갑자기 코앞에 나타날지 모르는 선물에 모든 관심을 쏟는 것보다는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무엇이고, 새해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번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돌아보면 아쉬움만 남는 한해였다. ‘봄이 온다’고 했던 2018년은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됐다. 대신 더 아득한 과거였다고 여겼던 2017년의 복귀를 걱정하게 됐다. 그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된 것일까? 아니 그사이에 도대체 무엇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된 것일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는 더 많은 행동이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국제 기고 전문 매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보낸 글 ‘무수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평화-한반도 평화 구상’에서 역설했다. 지당한 말이지만, 이 또한 말에 불과하다. 이 말에 앞서 한두 가지라도 실천했더라면 그 발언은 더 호소력을 가졌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에 관한 언설은 이미 차고 넘친다. 평화를 위한 방안이 없어서 평화가 이뤄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평화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하지 않아서 평화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마냥 설레는 마음만으로 2020년을 맞지 못하는 것은 올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화는 이 땅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지금 하나씩 행동으로 실천하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북-미 협상이라는 나무 밑에 누워 입만 벌리고 있기보다는 뒷동산에 사과나무라도 한 그루 심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는 핵무기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평양을 바라보며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스스로 이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주먹 쥔 손을 펴야 악수를 할 수 있다고 상대를 설득하려면, 자신도 손을 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이미 북의 정부 예산 전체를 훨씬 초과하는 액수를 국방비에 쓰고 있으면서도 이를 계속 늘리고 있다. ‘자주국방’이 국방비 증액의 핑계가 되고 있지만, 북과의 전쟁을 자주적으로 수행하겠다는 것이 진정한 자주국방인가.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자주국방이라면 북과의 전쟁 자체를 끝낼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평화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한 전략과 전술, 작전계획이 총체적으로 재수립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 위에서 적정군사력이 산출되고, 평화체제의 하위 도구로서 군대 위상이 갖춰져야 하지 않는가. 이 모두 미래의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논의하고 실천을 시작해야 ‘시끄러울 때’ 고요함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자주국방의 전망이 서야 한-미 연합훈련도, 더 나아가 한-미 동맹도 진정한 재조정이 가능할 것이다. 되돌아보면 보인다.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유엔사령부에 이양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미 동맹이 체결된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미연합군사령부(한미연합사)가 만들어지고, 작전지휘권이 다시 한미연합사에 넘겨진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한미연합사가 연합군사훈련을 해마다 하는 것도 한국전쟁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면, 한국전쟁이 종식된다면 이것들은 어떻게 해야 마땅한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일환으로 한-미 동맹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과정으로 바뀌어야 하는가.
남을 보느라 바쁘지 말자. 자신에게 묻고 또 묻자. 2020년을 맞아 대한민국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가. 지금부터 행동해야 경우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사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