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욱 ㅣ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1909년 런던의 한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유대인 부모는 2년 전 독일에서 이주했다. 그 가족은 영국의 융합 정책에 부응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영어식으로 바꿔 그 아이는 니콜라스 베르트하임에서 니컬러스 윈턴이 되었다. 금융인이었던 그는 뛰어난 펜싱 선수로서 영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지만 전쟁으로 1940년의 올림픽이 취소돼 참가하지는 못했다.
1938년 크리스마스 무렵 그는 프라하에 있었다. 본디 스위스 여행을 계획했지만 체코에서 영국으로 피난하려던 사람들을 돕던 친구 마틴 블레이크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칼럼에서 소개했던 “수정의 밤”이라는 사건을 통해 나치의 선전에 넘어간 대중이 폭도로 변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거칠게 자행되던 시절이었다. 그 사건 이후 영국 의회는 17살 미만 유대인 어린이의 입국을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체코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자임했다. 문제는 그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내는 일 자체였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의 보복을 두려워했는지 인접 나라들마다 국경에서 유대인들을 색출한 뒤 독일로 되돌려 보낸 것이었다. 아이들은 네덜란드에 집결하여 영국으로 떠나게 되어 있었으나 네덜란드 국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윈턴은 영국 정부가 그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보장을 얻어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구한 아이가 699명이었다. 그러나 윈턴은 아쉬워했다. 미국 등 다른 나라가 나섰으면 수천명을 더 구할 수 있었는데, 단지 스웨덴만 그중 일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윈턴은 50년 동안 이 일을 가슴에 묻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다락방에서 이 구출 작전과 관련된 상세한 스크랩북을 찾았다. 1988년 영국의 텔레비전에서 윈턴과 인터뷰를 했다. 방송에서 스크랩북과 함께 그의 선행이 소개되었다. 사회자가 물었다. “이 사람이 생명의 은인인 사람들이 있나요?” 20여명이 일어나 그에게 박수를 쳤다. 이들이 “윈턴의 아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