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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귀영의 프레임 속으로] 공정과 평등이 충돌할 때

등록 2019-12-19 18:25수정 2019-12-20 09:45

한귀영 ㅣ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장

얼마 전 만난 공공기관 노조위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다. 지난달 9일 전태일 열사 49주기에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집회 참여를 독려했더니, 젊은 조합원 여럿이 집회 내용에 ‘비정규직 철폐’가 있는지 물어왔다고 한다.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라 만약 포함된다면 집단으로 거부하겠다며. “간신히 설득하긴 했지만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비정규직 철폐 등 전태일 정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무임승차’를 명분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이익 챙기기에만 연연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의 씁쓸한 전언이다.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면서 비슷한 일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정규직에게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가장 큰 논리는 시험 등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지난달 서울시 청년청에서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19~39살 청년 1만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온라인 조사 결과는 이들의 ‘공정성’ 감각을 잘 보여준다. 동일한 일을 할 경우 “시험이 아니더라도 일정한 자격 조건을 충족하기만 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이 공정하다”(31.8%)보다 “시험 등 엄격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43.4%)에 대한 동의가 더 높았다. 동일한 노동에도 시험이라는 경쟁 절차 통과 여부에 따라 차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민간부문일수록 더 은밀하고 심각하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비정규직 백화점’으로 불리는 제2금융권의 실태를 조사했는데, 비정규직은 기간제에서 도급업체로, 그리고 또 다른 도급업체로 떠돌면서 오래 일해도 처우는 대개 제자리였다. 콜센터 아웃소싱 전문 업체에서 근무하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하는 일은 그대로였지만 기간제에서 도급사로 ‘내려가며’ 연봉도 줄고, 최근에는 일하던 도급업체가 경쟁입찰에서 탈락하자 또 다른 도급업체로 이직했다”고 말했다. 한 금융그룹사에서 일한 비정규직 노동자는 ‘2년 이상 근무 땐 직고용’ 규정을 피해 2년마다 다른 계열사로 소속을 옮겨가며 계속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돌고 돌아 비정규직 인생’의 쓸쓸한 모습이다.

정부가 사용자 구실을 하는 공공부문과 달리 민간부문에서는 노조의 역할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열쇠다. 현실은 어떨까? 앞의 실태조사에서 노조 간부를 대상으로 비정규직 이슈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지를 질문하자 83.9%가 ‘관심 있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비정규직 관련 활동’을 묻자 49.4%가 ‘없다 혹은 모르겠다’고 응답했다. 비정규직 이슈가 정규직 노조의 활동에서 겉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노조 간부는 “이전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시도했으나 승진, 임금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염려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강한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어 매우 조심스럽다”고 속내를 밝혔다.

공정과 평등은 진보의 핵심 가치이자 두 기둥이다. 경쟁 규칙과 절차의 공정함만을 강조하면 또 다른 진보의 가치인 평등을 침해하게 된다. 규칙과 절차가 공정하다 한들 그 이전에 사람들의 출발선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 관료를 과거로 뽑은 능력주의 사회였으니 당대 서구보다 훨씬 공정했다. 원칙적으로 양인이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는 평범한 농민 자제의 과거 합격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훌륭한 스승 밑에 장기간 공부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평민은 무자격자가 됐다. 시험이 공정해도 신분제가 고착되는 극단의 사례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노동존중 등 촛불정신을 상징하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이다. ‘공정성의 역습’ 속에 현장에서는 정책이 표류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물론 정규직의 반발에도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 공공부문의 총인건비가 정해져 있어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자기 몫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기심만 탓하기도 어렵다. 자원이 한정된 협소한 ‘그라운드’ 위에서 을들의 상호 배려와 연대는 난망하다. 법과 제도 개선을 통해 그라운드를 넓힐 때 ‘을과 을의 각축’도 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공정성을 강조해온 진보 정부의 소임이 아닐까?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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