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석 ㅣ 정의당 생태에너지본부장·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2019년 올해의 단어로 ‘기후비상’(climate emergency)을 선정했다. 옥스퍼드 사전은 ‘기후변화를 줄이거나 멈추게 하고 기후변화로 인해 잠재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환경 피해를 피하기 위해 긴급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이 단어를 정의했다. 지난해까지 ‘무명’에 가까웠던 이 단어의 사용 빈도가 올해 100배나 늘었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
‘기후비상’이란 단어가 이렇게 널리 사용된 것은 세계적인 기후비상선언 운동과 연관돼 있다. 200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활동가들이 지구의 날 집회에서 기후비상선언을 요구한 것이 시초가 되어 2016년 멜버른의 데어빈 시를 시작으로 2019년 11월 현재 24개국 1191개 지방자치단체와 의회 등이 기후비상선언에 동참했다. 지난달에는 유럽의회가 기후·환경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기후위기선언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집에 불이 났으면 일단 화재경보기를 눌러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리라는 것이다. 그다음 모든 힘을 다해 불을 끄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동안은 집에 불이 났는데, ‘어떤 방식으로 불을 끌 것인가?’ ‘불을 끄는 것이 가계 경제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같은 한가한 토론만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환경 담당 부서뿐만 아니라 재정, 경제, 국토, 교육, 농업 등 다양한 부서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도 ‘비상선언’이 중요하다. 기후비상선언 제안서에 ‘전시동원체계’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도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후위기는 전쟁에 준하는 위기 상황이라는 상황 인식이 포함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당장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기후변화’ 항목을 찾아보면 ‘일정 지역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기상의 변화’라고 정의한다. 이런 정의에 따른다면, 기후변화는 그다지 긴급하지도 않고 지구적인 행동을 보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기후변화 문제는 널리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 전국에 몇명 되지 않는 환경교사들은 점점 줄어드는 환경 과목 채택을 늘려달라고 몇년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체계적인 기후위기 교육은 이뤄지지 못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는 식의 가짜 정보를 비판 없이 수용하는 청소년도 많다.
도로 교통 분야에선 계속 늘어나는 자동차 등록 대수를 줄이는 정책은 없고 전기차와 수소차 ‘보급’ 정책만 추진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가 전기차나 수소차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동차가 증가하는 추세다. 대량의 온실가스를 내뿜는 항공 분야도 비슷하다. 항공 수요를 줄이고자 유럽 각국은 항공세를 신설하거나 인상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선 제주 제2공항, 흑산도 공항 같은 공항 신설 계획이 추진 중이다. 이들은 자동차 산업이나 관광 진흥을 우선에 놓고 기후문제를 뒷전으로 내팽개친 대표적인 예다.
우리나라 기후위기 대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에너지 분야다.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를 저감하기 위해 석탄화력발전소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지금도 우리나라는 7기의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 중이다. 과거 정부에서 인허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산업통상자원부의 설명이다. 발전사업자들에 대한 보상을 통해 허가를 취소하거나 연료 전환을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없다.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주무 부처인 환경부 또한 별다른 방법이 없다며, 손을 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우리가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라면 어땠을까? 적들이 밀고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법적 미비나 부처 간 권한을 핑계 삼아 손 놓고 있을까? 아마 언론은 이런 상황을 질타하기 바쁠 것이고, 국무총리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 부처 간 이견을 조율했을 것이다. 국회는 정쟁을 멈추고 빠르게 법률 개정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현재 기후위기를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보는지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단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기후비상 선언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