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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욱의 서양사람] 어두운 유언

등록 2019-11-21 18:14수정 2019-11-22 02:35

조한욱ㅣ한국교원대 명예교수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세살 때 뇌출혈로 사망했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정신병동에 갇혀 있었다. 훗날 아버지는 백인 관리인에게 맞아 죽었다. 실질적인 고아가 된 폴리 머리는 이모들과 외할머니 밑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노예제로 유지되던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노예였던 어머니를 농장 소유자가 강간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그 손녀는 꿋꿋하게 자라났다. 그렇다고 결코 순탄한 삶은 아니었다.

뉴욕으로 이주하여 고등학교를 마친 머리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대공황의 시기를 넘기고 시립대학교까지 졸업했다. 로스쿨에 진학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그에겐 더 큰 시련이 닥쳤다.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에 원서를 냈으나 당시 그곳에선 흑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학교뿐 아니라 그 주는 물론 남부 전체가 그러했다. 대학의 총장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까지 탄원의 편지를 쓴 뒤 그것을 매체에 공개했다. 여전히 버스에서 흑백의 좌석을 구분하던 버지니아에서 백인의 좌석에 앉아 있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을 통해 시민권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게 된 그는 결국 흑인들의 학교인 하워드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경험한 것은 인종차별 대신 성차별이었다. 로스쿨의 유일한 여성이었던 그에게 강의 첫날부터 ‘여자가 왜 법대에 오는지 모르겠다’는 교수의 발언이 있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가리키는 “짐 크로 법”에 빗대 머리는 그곳에서 “제인 크로 법”이 통용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 뒤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석사를, 예일대학교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본격적으로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저서 하나는 인권운동의 성서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학계를 떠난 그는 1977년에 성공회의 성직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어두운 유언>이라는 시집도 냈다. “희망이란 음정 없는 노래 속의 단어.” 그렇지만 “내게 희망의 노래와 그것을 부를 세상을 주시오.” 그는 그런 세상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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