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원 ㅣ 24시팀 데스크
방송사 예능국은 늘 문전성시다. 성지순례 하듯 예능국을 찾아 피디들에게 ‘인사드리는’ 연예기획사 매니저들의 발길 때문이다. 신보 발매를 몇달 앞두고부터 매니저들은 문턱이 닳도록 방송 3사와 케이블 방송사를 드나들며 눈도장을 찍는다. ‘페이스미팅’이라는 이름으로 매니저들이 피디에게 대면 영업을 하는 자리다.
하루 평균 60~70명의 페이스미팅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적고 기다리면, 기획사 관계자들은 피디와 5분 이내의 짧은 만남을 가질 수 있다. 피디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기획사가 부지런히 영업을 하는 이 자리는 새 음반을 낸 가수의 음악·예능방송 출연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성실성’이 기회의 척도라니 반가운 소리지만, 그 성실함을 평가할 저울을 가진 이가 한두명의 제작진이라니 오싹하기도 하다. 방송사 바깥 음지에서의 관계까지 포함해 ‘성실성’을 평가하는 거라면 더더욱 그렇다.
‘김영란법’ 이후 시들해지긴 했으나 예능국을 향한 기획사들의 접대 문화는 공공연한 관행이다. <엠넷>(Mnet)의 간판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엑스(X) 101> 관계자들이 기획사로부터 향응을 받았다는 정황이 보도돼도 업계 관계자들이 달리 놀라지 않는 이유다. 지역에서 현장 음악방송을 하면 기획사 관계자가 돈을 내어 단체 뒤풀이를 하는 문화가 남아 있는가 하면, 불과 몇 해 전까지도 아이돌 지망생들이 방송사와 기획사 관계자들의 저녁 자리에 불려 다녔다고 한다.
음악방송 제작이 끝난 뒤 제작진에게 90도 인사를 하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는 아이돌 멤버들의 풍경은 또 얼마나 구태의연한가. 케이팝 열풍의 포스트모던함에 견주면 그 이면의 전근대성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문화의 첨단에서 일어나는 이런 문화지체 현상은 유튜브처럼 직접 소통할 채널이 생긴 뒤에도 전세계 케이팝 소비자들에게 국내 음악·예능방송의 영향력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프로듀스 시리즈’를 통해 방송과 음원 유통과 제작에 이어 매니지먼트에까지 손을 뻗친 씨제이이엔엠(CJ ENM)은 이런 방송사 갑질 구조를 고도화했다는 게 매니지먼트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씨제이이엔엠은 계열사 구조 안에서 음원을 제작·유통하고, 음악방송과 예능방송에 출연시켜 매니지먼트까지 맡아 하며 ‘아이돌 상품’의 판매 구조를 장악했다. 흥행 참패로 끝나긴 했지만 <한국방송>이나 <제이티비시>가 프로듀스 모델을 그대로 본떠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방송이라는 열차를 타야 세계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중소 기획사들로선 방송사가 프로듀스 시리즈 방식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동원령’을 내릴 경우 비켜 갈 방법이 없다. 한두명을 큰 비용 없이 데뷔시킬 수 있는 만큼 중소 기획사로선 ‘접대 비용’을 내고서라도 뛰어들 만하다. 아이돌 그룹이 싱글 앨범만 내도 제작비가 3억~5억원은 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프로듀스 시즌1 시작 뒤 이 프로그램의 시장 지배력은 강력했다. 3대 기획사를 제외한 중소 기획사에서 독자적으로 데뷔해 성공한 아이돌 그룹은 극소수다. 아이오아이(IOI)나 워너원처럼 프로듀스를 통해 데뷔한 아이돌그룹과, 프로듀스 출연자가 속한 아이돌그룹만이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대박’이 아니라 ‘쪽박’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프로듀스 시리즈에 출연할 법하다. 프로그램의 외피를 보면 기존 3대 기획사가 아닌 중소 기획사들에 고른 기회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아이돌 골목상권을 고사시키는 구조였던 셈이다.
와이지(YG) 사태부터 엠넷의 프로듀스 사태까지, 케이팝 산업의 주축들을 중심으로 번진 악재들은 결국 새로운 시대를 이처럼 구시대적 관행으로 돌파하려 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는 사이 오늘도 젊은 매니저들은 ‘비티에스(BTS) 신화’를 꿈꾸며 방송사 문지방을 밟고, 숱한 아이돌 지망생들은 ‘피 땀 눈물’을 쏟으며 연습실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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