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채윤ㅣ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요즘 서울시는 성소수자 청소년을 위한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 수억원에 이르는 적지 않은 예산이 배정됐다. 하지만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조금만 동성애와 연결되어도 결사반대를 외치며 행정을 마비시키는 혐오 세력들도 몰랐으니,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겠다는 서울시와 사업을 맡은 기관의 작전은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공일까.
청소년 성적 소수자들은 학교와 가정, 온라인 커뮤니티와 교회 등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공간에서 ‘동성애는 역겹다’ 등의 심각한 혐오 표현에 시달린다. 게이 같다거나 트랜스젠더냐는 놀림과 괴롭힘을 당하고 폭력 피해를 입기도 한다. 상담복지 시스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역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으로 안전하게 이용하긴 어렵다. 이런 사정 때문에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나왔고, 이에 따라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서울시 예산으로 거리이동상담사업이 진행된 적이 있다. 2011년 이후 관련 예산 항목이 사라졌지만, 이후로 인권단체들은 아주 어렵게 후원금을 모아 청소년 지원사업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어갔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며 함께 활동하고, 경험을 쌓고, 연구하는 전문가도 늘어났다.
올해 서울시가 지원사업에 예산을 배정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사업을 받은 곳은 단 한번도 성소수자 청소년 관련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기관이었다. 일을 잘할 것인지가 기준이 아니라 마치 성소수자 관련 예산을 줘도 겉으로 티가 나지 않을 곳을 고른 것 같았다. 나는 지난해 겨울에, 갑자기 사업을 떠맡았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해당 기관의 대표에게 전화를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그간의 전말을 알게 됐다.
혐오의 눈치를 보면서 혐오 때문에 위기에 놓인 청소년을 돕는 것이 가능할지 우려됐지만 기꺼이 돕고자 했다. 정석대로 하면 못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먼저 해당 주제에 대해 잘 알고 경험도 있는 전문가들로 실행팀을 꾸린다. 총책임자를 비롯해 기관 내 모든 실무자는 자기 안의 편견과 혐오를 점검하는 교육을 받는다. 또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선행 사업을 한 곳들의 경험을 경청하고, 청소년 성소수자의 현실을 파악하기 위한 실태 조사와 대안을 찾는 연구 사업을 진행한다. 홍보 방식을 다각도로 개발하고 청소년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이며,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자긍심과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운영 프로그램을 짠다.
이렇게 하리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기관의 태도가 달라졌다. 기획안에서부터 성소수자란 단어를 감췄다. 직원 교육도 거부했고 연구 사업도 취소했다. 그러면서도 기관에 청소년 성소수자가 많이 찾아오길 원했다. 급기야 아는 청소년들을 데려오라는 말까지 나왔다. 결국 뜻깊은 사업이라 여겨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합류한 전문가 다섯명은 파행적 운영을 견디다 못해 집단 사퇴를 했다. 서울시에 문제 제기를 했지만 특별히 시정되는 건 없었다. 내년 예산이 같은 기관에 다시 배정됐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한숨이 난다. 돈만 있다고 저절로 성과가 나오진 않는다. 성인지 관점이 없을 때 성차별을 줄이라고 만든 예산이 어떻게 쓰이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올해 서울시 자치구에서 시행된 성인지 예산 사업은 어이없게도 도시양봉체험(강동구), 도시텃밭(성북구), 가로수 정비와 비누 만들기(서초구) 같은 것들이다. 정책의 목표를 정확히 알고, 명확한 평가 기준이 있는 관리감독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
서울시가 청소년 성소수자를 위한 예산을 배정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꼼수를 부려선 안 된다. 적당한 회피가 우아한 전략이 될 수는 없다. 서울시는 정녕 청소년들을 위해 혐오에 맞설 수는 없을까. 예산을 제대로 쓰기 위한 적극적 노력을 할 수 없을까. 방향을 잃은 돈은 언젠가 독이 되어 돌아온다. 나는 이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