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폴리호 태풍이 일기 시작하는 여름밤에
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
꼴이 우습다”
김수영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4·19혁명 직후인 1960년 7월이었다. 부정선거로 촉발된 학생시위가 전국 대규모 시민시위로 확대되어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한 직후였다. 한국 사회는 혁명으로 들끓고 있었다. 반민주행위자 처벌법이 논의되고, 정치적 자유화는 평화통일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반면 이런 혁명적 변혁을 불편하게 여기는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부는 이미 9월부터 조직적인 군사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혁명과 반동이 맞부닥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던 때였다. 이러한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소소한 일상에 매몰된 자신을 ‘아내’에게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자신의 꼴이 우습다고 자조한 것은 아니었을까.
2019년 11월 대한민국에도 찬바람이 몰려온다. 봄이 왔다며 훈풍이 불던 남북관계는 이미 차디차게 식었다. 예술단 교환 공연은 이미 오래된 과거가 됐다. 축구경기장에서는 남북 선수들만이 거칠게 몸싸움을 하고 응원단도 관중도 없었다. 남북 도로와 철도를 연결하겠다는 착공식이 열린 지 1년이 다 됐지만 착공은 요원하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은 재개를 언급하기조차 민망한 상황이 돼버렸다. 북은 아예 남측의 시설을 다 들어내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사이 북은 신형 전술유도무기들과 초대형 방사포를 개발했다. 한국은 신형 미국 무기들을 사들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그나마 휴전선 일대가 조용하다는 데서 위안을 받고 있지만, 그 조용함이 계속될 수 있을까?
남북이 주고받는 찬바람의 소용돌이는 더 큰 태풍을 예고한다. 이미 지난 4월부터 예고된 태풍이다.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미국이 제재와 압박을 계속한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천명했고, 4월 시정연설에서는 그 마감일까지 고시하지 않았는가. 마감일까지 이제 두달도 채 남지 않았다.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 중단, 풍계리 핵시험장 폐쇄, 미군 유해 송환 등 북은 북-미 관계 개선과 비핵화를 위해 선행 조치를 하고 있다. 연말까지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없다면 이런 선행 조치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을 천명했으니 단순하게 과거와 똑같은 핵시험이나 미사일 시험발사만을 되풀이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미 남북 사이에 일고 있는 찬바람의 소용돌이가 북-미 태풍과 맞물려 한반도를 한겨울로 꽁꽁 얼어붙게 하기 직전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성과가 적지 않다고 위안으로 삼을 시기가 아니다. 트럼프 정부가 최대의 압박과 관여로 오바마 정부보다 나은 결과를 가지고 왔다고 자랑할 시점도 이미 지났다. 그 위안과 자랑을 뒤엎을 ‘태풍’이 이미 코앞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아직도 정부 당국자들에게서는 위기감을 찾기 어렵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금강산 실무회담을 제안하는 안이함이 놀랍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국무부 부장관에 지명되어 북-미 협상에 힘이 실릴 것이라는 낙관이 우려스럽다. 지금은 실무급에서 세부적 정책을 만지작거릴 계제가 아니다. 태풍이 예보되면 범정부 대책을 꾸리지 않는가. 한반도에 ‘태풍’이 오는 것이 뻔한데 왜 범정부적인 위기 대응을 하지 않는가.
최소한 한국 국가안보실장과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뛰어야 한다. 통일부와 외교부, 국방부는 물론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재무부까지 포괄해 양국이 범정부적 대북정책 포괄 조치를 내놓고 뛰어도 부족할 시점이다. 이 포괄 조치에서 한-미연합훈련 중단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그것만으로는 태풍을 막을 수 없겠지만 그것조차 없다면 맨몸으로 태풍을 맞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평화체제 구축을 약속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공동선언에서 ‘실질적인 전쟁위험 제거’를 약속했다. 그런데도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포함해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합의가 없는 것은 기이한 현상이다. 한국과 미국의 최고위 당국자가 만나 남-북-미 관계 전환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합의로 이런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
몰려오는 ‘태풍’을 막으려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각오가 절실하다. 앞에서 인용한 시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음미한다.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