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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9월9일 오전 10시10분의 대한민국

등록 2019-09-05 18:02수정 2019-09-05 19:12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 강제추행 5회,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 이것이 2017년 7월29일부터 2018년 2월25일까지 약 7개월간 자신의 수행비서를 상대로 저지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피고인이 된 이유다. 법정의 판단은 갈렸다. 2018년 8월14일에 열린 1심에서는 무죄가 나왔고, 2019년 2월1일에 있었던 2심에서는 유죄, 3년6개월 징역형이 선고됐다. 이제 9월9일 오전 10시10분에 최종 결론을 짓는 상고심 판결이 나올 예정이다.

1심과 2심은 법정 드라마에서 종종 보듯이 검사와 변호사가 서로의 증인을 심문하고, 증거를 제시하며 엎치락뒤치락하지만 대법원에서 열리는 상고심의 형태는 다르다. 새로운 증거나 증인은 없으며 판사의 직접적인 심문 과정도 없다. 상고심은 2심 재판에서 법리적 오류가 없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하여 원심의 결정을 그대로 유지할지,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재판이다. 안희정 전 도지사 사건의 경우엔 1심과 2심의 재판 결과가 정반대였기에 대법원이 어떤 법리 해석을 판례로 남기느냐에 따라 향후 유사한 직장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9월9일 판결에 모두 관심을 가지고 주목을 해야 할 이유다.

1심과 2심의 판결이 정반대였기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모호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여전히 많다. 그러나 몇달 사이에 판결이 바뀐 이유는 실체적 진실이 드러난 결정적 증거가 달라져서가 아니라 재판부의 접근 방식 때문이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아니라 피해자만 직접 12시간을 심문했고, 그 과정에서 심지어 피해자에게 ‘정조’를 운운하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피해자의 진술을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을 재판정에 출석시켜서 직접 질문을 하며 피고인 진술의 일관성도 검증했다. 현재 상고심에서 안희정 변호인 쪽은 처음에 합의가 있었고, 그 뒤부터는 자연스럽게 성적 접촉을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3월5일 피해자가 방송에서 사건을 고발한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합의한 관계라는 비서실의 발표는 잘못된 것’이라고 합의가 아님을 인정한 것은 바로 안희정 자신이었다. 1심과 2심에서 변호인 쪽은 애정 관계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그들은 실제 애정 관계임을 증명할 증거는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오히려 근무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불시로 담배 등의 심부름을 시킨 정황 등을 보면 추행 이후에도 공적인 위력 관계는 그대로 유지됐다고 판단할 수 있는 증거만이 있다. 더군다나 자꾸 간과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는 피고인은 주요 증거물인 자신의 휴대폰을 폐기했다며 끝내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심은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한 이후에도 내색을 하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며 강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지만, 2심 재판부는 피해를 입고도 내색을 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위력이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다는 근거로 포착했다. 안희정 쪽은 상고심을 준비하면서 기존 변호인단에 다시 대형 로펌을 추가해 총 17명의 역대급 전관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이런 점이 판결에 영향을 끼칠까.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미 대법원은 부하 직원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김문환 전 에티오피아 대사에 대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지난 7월22일 유죄 판결을 최종 확정한 바 있다. 위력이 존재하되 행사되지 않으려면 위력을 가진 쪽이 상대의 의사를 존중하려고 먼저 노력해야만 가능하다. 이것이 피해자에게 왜 요령껏 피하지 못했느냐고 탓하기 전에 작동해야 할 사회의 상식 아닐까. 상고심이 직장 내 성폭력이 남녀 간의 성적 문제가 아니라 위력이 작동하는 노동권의 문제로 바라보는 계기를 만들어주길 바란다는 사람들의 바람대로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의 정의가 살아 있는 판결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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