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 명예교수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를 필두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대학생들과 노동자가 연합하여 국가의 억압과 새로운 식민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시작된 그 열풍은 곧 중부와 동부 유럽의 공산권 국가로도 번져 언론의 자유에 대한 요구와 인권 탄압에 대한 저항의 물결이 크게 일었다. 미국 뉴욕시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는 같은 해 4월부터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이었다. 단초는 1967년 3월 한 학생이 그 학교의 국제법 도서관에서 발견한 문서였다. 컬럼비아대학교가 미국 국방부 소속의 무기 연구소와 연결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연구소의 실체가 드러나자 미국의 베트남 참전에 반대하던 학생들은 국방부와 연결된 대학 행정부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반면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에서는 자료를 폭로한 학생은 물론 과격파로 분류된 학생 여섯명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흑인 주민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할렘가에 근접한 컬럼비아대학교에서는 1965년부터 체육관 건립 계획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지역 주민과 대학교 관계자들이 각기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게 설계함으로써 1964년에 확립된 흑백 융합 정책을 명백하게 위반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도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다. 대학교에 반대하는 두 세력이 합세하여 도서관으로부터 체육관 예정지까지 행진하며 공사를 중지시키려 했다. 저지하던 경찰이 학생 하나를 연행하자 학생들은 대학 행정 본부가 있는 건물을 점거했다. 결국 9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구속되고 시위대와 경찰 모두가 많은 부상자를 내며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대학교는 단기적으로 재정적인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인종차별의 잔재가 사라지면서 학교의 정책도 더 유연해졌다. 그 시위의 과정에서 끝까지 학생들의 편에서 옹호해주었던 분이 <세계체제론>의 저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였다. 일전에 작고하신 그분을 추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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