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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홍콩 ‘민주화 운동가’ Y에게 / 선담은

등록 2019-09-01 17:43수정 2019-09-01 19:16

“우리는 중국인(Chinese)이 아니라 홍콩인(HongKonger)이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꼭 22년이 되던 지난 7월1일. 사상 초유의 점거 시위가 벌어진 홍콩 입법회 앞에서 만난 청년 와이(Y)는 “당신은 중국인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과 동갑내기(1996년생)인 그는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홍콩의 한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 1989년 일어난 ‘천안문(톈안먼) 민주화운동’은 학교 선생님과 구글 검색을 통해 알았다고 했다. 와이는 인터넷에서 ‘천안문’이나 ‘6·4’(1989년 중국이 무력을 투입해 천안문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날)를 검색할 수 없는 중국 본토 청년들과는 분명 다른 삶을 살아왔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시위의 이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며 그가 위키피디아를 검색할 동안, 나는 그것이 3년 전 국정농단 촛불집회일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와이는 “우리의 시위도 한국처럼 성공했으면 좋겠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아이폰을 건넸다. 화면 속에는 한자로 쓰인 표제어 ‘광주민주화운동’(光州民主化運動)과 함께 ‘5·18민중항쟁추모탑’ 사진이 담겨 있었다.

나보다 열살 어린 홍콩의 청년이 내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기억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이기도 했다.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데….” 나는 부디 홍콩이 1980년 5월의 광주가 되지 않길 바란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그에게 영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말았다.

애드미럴티역에서부터 수백미터의 인간 띠를 만들고 입법회 안에서 싸우는 시위대에 우산과 헬멧 등을 전달하는 청년들이 보였다. 열에 아홉은 10대 후반~20대 초·중반의 말 그대로 ‘꽃다운 청춘’이었다. 홍콩 입법회와 정부종합청사의 바로 옆 블록에는 홍콩에 주둔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사령부 건물이 있다. 2019년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이 30년 전 천안문과 같은 유혈진압에 나설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경찰이 실탄을 사용해 경고사격을 하거나 빈백건(bean bag gun)에 맞아 시위 참가자가 실명 위기에 처하는 일이 생길 거라고는, 두달 전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 중국 정부를 막아설 수 있는 건 주변국의 여론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그들(중국)이 홍콩에서 폭력적인 무언가를 한다면 내가 (미-중 무역갈등을 마무리하는) 합의에 서명하는 것이 훨씬 힘들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막말을 일삼는 ‘천조국’ 대통령에게 난생처음 고마움을 느꼈다. 반면, 내가 사는 한국은? 홍콩의 ‘ㅎ’자라도 꺼내는 정치인을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웡과 인터뷰한 에스비에스(SBS) 기자가 ‘취재파일’에서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린 웡으로부터 “한국의 정치인들은 왜 홍콩의 시위에 대해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발언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고백했을까.
(▶관련 기사 : [취재파일] 조슈아 웡, 제발 만나줘요…홍콩 민주투사 인터뷰 성공기)

중국과의 외교든 무역문제이든 냉정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인들은 1970∼80년대 홍콩의 국제 기독교 운동단체들이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와이는 나와 헤어지며 “한국 사람들은 홍콩 시위에 얼마만큼 관심이 있어?”라고 궁금해했다. 7월1일은 판문점에서 북-미 정상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된 다음날이었고, 우리 국민과 언론의 관심도 그에 쏠렸다. 딱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 “한국에 돌아가면 홍콩 기사 많이 쓸게”라고 답했다. 그런데 지난 두달,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건 ‘노 아베’와 ‘조국 후보자’ 두가지 단어뿐이다.

나는 홍콩에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해 이 글을 쓴다. 광주를 기억하는 홍콩의 청년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줬나.

선담은
24시팀 기자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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