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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이성애자를 정중히 사양할까요?

등록 2019-08-08 18:11수정 2019-08-09 13:48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얼마 전 서울 지역의 어느 회사에서 채용 공지를 냈다.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 솔직하고 털털한 분을 우대한다는 말과 함께 ‘동성애자는 정중히 사양합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게임 개발을 담당할 직원을 뽑는데 왜 갑자기 성적 지향이 채용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일까. ‘사무실에 여직원이 없습니다’라는 안내도 뜬금없이 병기되어 있는데 이것이 혹 동성애자를 사양하는 이유일까. 남성만 있는 사무실에 동성애자가 있으면 안 되기에? 짐짓 점잖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 같지만 동성애자는 이력서도 내지 말라는 의미이니 명백한 차별이다.

비슷한 일이 대구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4월, 대구구치소에서 동성애자로 밝혀진 50대 수용자가 입소했다. 교도관은 바로 독방으로 배치했고, 수용자는 혼거실을 원했으나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며 거부했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원래 모든 수용자는 독거가 원칙이다. 대구구치소는 이런 원칙을 적용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지만, 그 법에 의하면 역시 수용자의 생명 보호나 심리 상태 안정에 필요할 시 혼거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수용자는 그동안 자살 시도를 두 차례나 할 만큼 독거를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대구구치소는 혼거 대신 지난 2일엔 아예 자해와 자살 시도를 감시할 수 있도록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달린 독방으로 옮겼다. 마치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절대 한 공간에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치소장은 이에 항의하는 대구 지역의 인권단체들과의 면담에서 “혼거를 했다가 성적 사건을 일으키면 더 큰 문제가 된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지내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단하여, 수용자에게 고통을 주는 독방 수용을 유지하는 것이 편견에 따른 차별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몰랐으면 모를까, 이미 동성애자인 걸 ‘아는데’ 혼거를 하게 할 수는 없다고. 결국 구치소에 동성애자가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동성애자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의미다. 게임회사의 사장도, 구치소 소장도 스스로 최면을 걸고 내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지 마라, 그러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문을 외우는 셈이다.

두 곳 모두 현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가 들어갔지만 두 곳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방부의 태도도 별다르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과 함께 군 생활을 해왔음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국방부는 누가 동성애자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부터 갑자기 견디질 못한다. 동성애자가 군대 전체를 위험에 빠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처벌하고 내쫓길 원한다. 이런 인권 침해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7월말에 한국 군대 성소수자 인권 상황 보고서를 냈다. 그 제목은 ‘침묵 속의 복무―한국 군대의 LGBTI(성소수자)’다. 의미심장하다.

동성애자로 인지되지 않는 한 당연히 이성애자일 거라고 간주하는 사회는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이 아직 ‘인지하지 못한’ 동성애자와 ‘인지해버린’ 동성애자를 다르게 대한다. 차별은 이렇게 작동하고 공공연한 사회적 억압으로 굳어진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동성애자 단체에서 ‘이성애자는 정중히 거부합니다’라는 공지를 낼 수 있을지. 그런데 전국의 많은 성소수자 단체에는 이미 이성애자 활동가들도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정체성의 동일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호하게 차별주의자를 사양한다. 혐오와 편견이 우리 안에서 활개 치는 것을 사양한다. 지금 내가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가 함께 사는 공동체의 윤리에 대해 생각하면 누구나 그러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기관도 그러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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