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하
전국1팀 선임기자
억울한 주검에 또 한번 낙인이 찍혔다. 1980년 5·18 당시 보안사령부는 총알이 몸속에 들어갈 때 입구(사입구)의 크기와 몸을 뚫고 나온 출구(사출구)의 크기 차이로 폭도와 비폭도를 갈랐다. 계엄군이 지녔던 M16은 시민군의 카빈 소총보다 탄환의 회전력이 커 사출구가 더 컸다. M16에 맞아 사망한 이는 계엄군에 저항한 자, 즉 폭도로 분류됐다. 다만 이들 가운데 교전 지역이 아닌 곳에서 사망한 자나 14살 이하, 50대 이상, 공무원 사망자 등은 폭도에서 제외했다. 보안사령부는 5·18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주검들을 검시한 뒤 폭도 숫자를 조정했다. 그들은 5·18을 폭도들이 광주에서 일으킨 폭동이라며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라고 불렀다. 이 명칭에는 광주 시민들이 느꼈을 고립감과 공포감이 스며 있다.
1980년 5·18 당시 보안사령부가 작성한 폭도와 비폭도 기준을 적은 문건.
5·18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는 것엔 가해자의 편에 서서 학살에 가담한 행위를 부인하고 싶은 심리가 반영돼 있다. 또한 시민들이 저항했던 장소를 광주로 국한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다. 5·18 당시 광주에 왔던 계엄군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말을 쓴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나는 광주사태의 치유·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썼다. 전씨는 12·12 쿠데타로 군권을 탈취하고 5·17 내란으로 정권을 찬탈했던 신군부의 핵심 리더였다. 그는 1980년 5월 시민들을 학살(폭동 행위)하고 충정작전을 통해 18명의 목숨을 잃게 한 혐의(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유죄를 확정받았는데도 마치 피해자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5·18의 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다. 이는 국가 차원에서 결론 내린 사안이다. 관련 법률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등으로 5·18민주화운동으로 돼 있다. 정부가 해마다 여는 기념식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다. 이 명칭이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에 광주라는 도시 이름이 빠진 것은 두가지 의미를 담는다. 첫째, 5·18이 광주에서만 돌출됐던 저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둘째, 5·18이 1979년 유신체제 붕괴 이후 부산·마산항쟁, 서울의 민주화운동의 맥을 잇는 투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다. 진보 학계에선 민중이라는 저항 주체에 방점을 찍어 광주민중항쟁이나 5·18민중항쟁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1980년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차를 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차량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지만 여전히 가해자 편에 섰던 이들은 5·18을 광주사태라고 부르며 희화화한다. 5·18 이후 창당된 민주정의당에 뿌리를 대고 있는 자유한국당에도 5·18을 광주사태로 부르는 ‘망언 의원’들이 건재하다. 보수성향의 단체에선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점을 알고도 5·18 유공자 명단을 밝히라고 주장한다. 급기야 지난 18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리던 날, 광주 금남로에서 5·18 유공자 명단을 밝히라고 주장하던 이들이 유행가를 불러댔다. 광주 시민들은 감정적인 대응을 자제하며 분을 삭였다.
5·18을 조롱하고 폄훼하는 것은 생존자와 유가족에 대한 명백한 2차 가해다. 5·18의 보편적인 의미를 공유하는 명칭에 딴지를 걸고 나오는 것은 불철저한 역사청산 때문이다. 전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씨가 1980년 5월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는 사실을 미군에 보고했다고 증언한 것처럼,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진실이 적지 않다. 국회 청문회와 검찰 수사,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도 가해자들의 조직적인 은폐로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5·18진상규명특별법엔 진상규명에 협조하면 가해 행위를 처벌하지 않도록 건의하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5·18 암매장과 헬기사격, 집단발포 명령과 관련한 결정적 증언을 끌어내기엔 부족하다. 김용장씨처럼 홀로 지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놓고 용기있게 증언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