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내년 미국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예비경선이 벌써부터 뜨겁다. 이번 예비경선을 달구는 것은 단순한 정권 탈환 의지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미국 사회를 바꾸겠다는 열망이다. 경선 출마자들의 면면과 주장에서 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후보는 역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다. 샌더스는 4년 전에도 민주당 예비경선에 뛰어들어 힐러리 클린턴과 경쟁했다. 이때 그는 젊은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도 불공정한 선거 규칙 탓에 탈락하고 말았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화씨 11/9>는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가 얼마나 편파적이었는지 생생히 전한다. 하지만 샌더스는 그저 맥없이 패한 게 아니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내걸고 미국을 복지국가로 만들자고 외친 그의 선거운동은 미국 정치의 왼쪽 경계에 버티고 있던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예컨대 이번 민주당 예비경선 후보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오바마케어 대신 제대로 된 단일 공공 의료보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도 정책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는 분위기다. 샌더스는 이번에도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 뉴딜, 대학 무상교육, 노동조합 권한 강화, 군비 지출 축소, 총기 규제 같은 진보적 대안을 주창한다. 하나같이 미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금기시하던 주장인데도 그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제외하면, 민주당 주류에게는 그에게 맞설 카드가 별로 없다. 2016년과 달리 본선에서 트럼프-샌더스 대결이 펼쳐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데 샌더스만이 아니다. 또 다른 유력 주자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도 참신한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워런은 대기업을 사회가 통제하기 위해 노동자와 소비자, 지역사회의 이해를 대표하는 이들을 주요 법인 이사회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최근에는 6400억달러(약 730조원)에 달하는 학자금 대출을 탕감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인디애나주 사우스벤드 시장으로 지지율 3위를 기록하며 바람을 일으키는 피트 부티지지 후보는 30대의 동성애자다. 그 역시 노동조합 활성화와 복지 확대가 주요 공약인데, 커밍아웃한 게이이기에 특히 소수자 인권의 대변자로 떠오르고 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젊은 후보로는 아시아계인 앤드루 양이 있다. 벤처기업가인 그는 공직 경험이 없는 정치 신인이다. 하지만 공약은 모든 주자 가운데 가장 원대하다. 그는 급속한 자동화에 맞설 대안은 기본소득밖에 없다며 모든 미국 성인에게 매월 1000달러(약 114만원)의 ‘자유배당’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아직 지지율은 낮지만, 공약만 놓고 보면 가장 화제가 되는 후보는 앤드루 양이다. 이것이 지금 미국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지형이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미국 정치가 이렇게 되리라고 이야기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지금 실제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이런 변화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미국이 지구 자본주의의 기둥 노릇을 하는 유일 제국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치 지형의 왼쪽 공간이 이렇게 넓어질수록 지구 위 다른 나라의 정치 지형 역시 전에 없이 자유로워지게 된다. 또한 미국 내의 사회개혁은 곧바로 세계 정치의 향배와 직결된다. 미국 정부가 사회개혁에 몰두할수록 군비 지출을 줄이라는 압박이 커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 미국은 전쟁국가 미국과 결코 병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2020년 미국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다. 미국을 너무나 사랑해 주말마다 성조기를 흔드는 이들과 함께 이 드라마의 결말이 어찌 될지 지켜보고 싶다. 미국인들이 새로운 조국에서 눈을 뜰 때, 온 인류는 더 이상 전과 같을 수 없게 된 세상에서 서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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