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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폭력에 물 타는 공익광고

등록 2019-04-18 16:01수정 2019-04-19 14:52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데이트 폭력 예방 홍보물을 제작했다. 아끼는 척, 걱정하는 척, 관심인 척, 소중한 척 하면서 어떤 옷을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등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네쌍의 커플을 보여준 뒤, ‘사랑하는 척하지 마세요. 데이트 폭력, 강요와 통제에서 시작됩니다’라는 자막으로 마무리한다. 광고가 방송을 타자, 일부 남성 온라인 게시판에서 환영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유는 하나다. 폭력 가해자로 남자와 여자가 정확하게 반씩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성별 균형이 맞추어진 광고가 나왔다며 칭찬이 쏟아졌다. 만약 제작자가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면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광고 제작의 목표가 데이트 폭력을 줄이는 것이라면 실패다. 핵심 메시지가 없다. 사랑하는 척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을 하라는 것인지, 사랑하는 척하느니 헤어지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가해자들은 너무 사랑해서 죽였다고 하고, 헤어지자고 말한 것이 화가 나서 죽였다고 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아마도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는 살인이나 폭행 등의 데이트 폭력이 상대를 통제하려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연구 성과에 착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착각도 했다. 통제하려는 태도로 시작해서 살인까지 저지른다가 연구 결과는 아니다. 우리나라 어떤 경찰도 남자 친구가 짧은 치마를 입지 말라고 통제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다고 체포되는 일은 없다. 성폭행, 구타, 감금 등에는 경찰이 개입하지만 너무 늦었을 때도 있다. 그러므로 폭언과 구타, 그리고 살인에 이를 때까지 연인 사이에 흔히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으로 간과하지 말고 통제와 강요를 더 큰 폭력의 전조로도 생각하고 미리 조심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 연구의 메시지다. 그렇다면 피해자와 제3자로서의 주변인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요청하는 공익광고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래전부터 여성을 향한 폭력을 다루는 공익광고는 폭력 피해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2003년 공익광고협의회가 만든 가정폭력 예방 홍보물은 한쪽 눈이 멍이 든 엄마를 그린 아이의 그림 옆에 ‘엄마 눈은 달마시안’이라는 문구를 달고, 그 아래에 ‘가정폭력은 물려줘서는 안 되는 위험한 유산’이라고 했다. 아내를 구타하지 않아야 할 이유로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요청이 사회적으로 물려주면 안 되는 유산이기 때문이라고 설득을 하는 모양새다. 2012년 여성가족부가 만든 가정폭력 예방 영상물에는 “가정폭력은 당신과 당신 가족의 행복을 빼앗는 범죄입니다”라는 자막이 흘렀다. 집 안에서 늘 폭력과 살해 위협에 시달리는 피해자의 고통 대신 가해자에게 너의 행복도 사라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한다.

경찰청 발표에 따르면 2017년에 검거된 데이트 폭력 가해자가 1만303명이었다. 사건의 73.3%가 폭행·상해였고, 그 뒤를 이은 폭력 유형은 감금·협박이었다. 마지막 유형이 살인(미수 포함)이다. 통계상으로는 0.7%에 그치지만, 더 쉽게 설명하자면 한달에 평균 6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거나 잃기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의미다.

데이트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많은 사건이 계속 터졌기 때문이다. 가해자 가운데 여성이 단 한명도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남성 가해자가 많은 건 사실이다. 결코 남성이 모두 나쁘고 악한 건 아니다. 오히려 한쪽 성별로 치우친 현상을 보인다면 우리는 사회의 어떤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도 강한 영향력을 지닌 공익광고에서 굳이 여자가 가해자가 되는 상황까지를 고려해서 데이트 폭력을 사랑하는 척하는 이들의 다툼으로 다루는 것인가. 과연 누구를 위한 공익광고인가. 마지막으로 대신 공익광고를 하겠다.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긴급 상담 전화는 136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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