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다른 나라 진보정당 정치가들의 이력을 보면서 낯선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그중에는 노동운동가 출신도 있고, 인권변호사였던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의 첫 정치경력은 지방의원이었다. 지역 정치가로 활동하다 두각을 나타내 국회의원 후보로 추천되거나 당 요직에 선출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잘 알려진 인물 가운데에도 이런 이들이 꽤 있다. 가령 독일 사회민주당의 총리 후보와 대표를 맡고 재무장관을 역임한 오스카어 라퐁텐이 그렇다. 그는 고향 자르브뤼켄주에서 지역 정치가로 활약하다 사회민주당의 총아로 떠올랐다. 또 다른 예로는 프랑스의 장뤼크 멜랑숑을 들 수 있다. 그는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거의 20%를 득표하며 프랑스 좌파의 새 구심으로 부상했다. 한데 그 역시 30대 초반에 지방의원에 선출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더 유명한 인물로는 미국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있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두번째로 출마를 선언한 그는 연방 하원 진출 전에 8년간 버몬트주 벌링턴시의 시장이었다. 벌링턴시의 참신한 시정이 전국적 주목을 받은 덕분에 그는 무소속 사회주의자로 연방 하원, 상원에 차례로 입성했고, 이제는 미국 전역에 진보정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캐나다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캐나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신민주당은 오랫동안 보수당, 자유당의 의석에 크게 못 미치는 제3당이었다. 그런데 2011년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제2당 지위를 거머쥐었다. 이때 이 돌풍을 이끈 이가 잭 레이턴 대표인데, 그는 대표가 되기 전까지 연방 하원의원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순전히 토론토 시의원 경력으로 대표가 됐다. 안타깝게도 레이턴 대표가 돌연 병사한 뒤에 신민주당은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고자 당원들이 새 대표로 선출한 이가 올해 40살인 시크교도 자그미트 싱이다. 한데 그 역시 대표 경선 당시에 연방의회 경력이 없는 온타리오 주의원이었다. 한국 정치에서는 아직 보기 힘든 광경이다. 여의도 국회는 판사, 검사, 변호사였거나 고위 공무원이었던 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엘리트나 명망가가 주류 정당 공천을 받아 어렵지 않게 당선되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의 일상적 풍경이다. 이런 국회의 반대편에는 고인 물처럼 지역 토호들의 전유물이 돼 있는 지방의회가 있다. 물론 정치가 유형은 다양할수록 좋다. 지역에서 커온 사람도 있어야 하고, 각 분야 전문가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역 정치를 경험하면서 단련된 좋은 정치가가 드문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가 여전히 굳건하지 못함을 증명한다. 대의민주주의라는 간판 아래 실은 강고한 엘리트주의가 작동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한국 정치 구조에서 진보정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나라 진보세력과는 달리 한국 진보정당에서는 지역 정치를 통해 성장한 지도자를 찾기 힘들다. 진보정당 역사가 일천했던 2000년대에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역사 탓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막힌 지점들을 가장 앞장서서 뚫어나가는 것이 늘 진보정당에 사람들이 거는 기대 중 하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창 보궐선거가 진행 중인 창원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반갑다. 노회찬 의원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치르게 된 이 선거에서 그의 뒤를 이어 출마한 정의당 여영국 후보는 전 경남도의원이다. 토박이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 8년 동안 경남도의회에서 새누리당 소속 단체장의 공공의료시설 무단 폐쇄 등에 맞선 인물이다. 드디어 한국 진보정당에도 그간 익숙했던 유형과는 다른 정치가상이 부상하는 조짐인가? 마치 15년 전 이맘때에 그가 변화의 메시지를 서민의 언어에 담아 전하며 한국 정치에 새바람을 일으켰던 것처럼, 다시 그런 봄바람에 설렐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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