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1972년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UCLA) 사학과 교수가 그 시의 경찰서장을 고소했다. 사복 경찰들이 학생처럼 위장하여 강의실과 학생 단체의 동향을 사찰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975년 대법원에서는 하급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이러한 사찰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대학에서의 사찰이 금지되었다. 그렇게 사회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사학과 교수가 헤이든 화이트였다. 그런 태도는 연구 활동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역사의 부담’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체한 역사학계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역사가는 과거와 현재의 외형만 번드레한 연결성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성을 가르칠 수 있는 역사를 추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왜냐하면 단절과 분열과 혼돈이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태도와 역량이 결집되어 1973년에 출간된 저작이 <메타역사: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미보다 약간 뒤늦게나마 1990년대 후반부터 문화사 열풍이 불었는데, 그것의 이론적 배경을 이루는 한 축이 “언어적 전환”이었고 <메타역사>는 역사학에 언어적 전환을 몰고 온 기념비와도 같은 업적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그의 주장은 역사 서술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 문학적인 요인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과거의 사실은 과학적으로 검증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역사 서술은 아니다. 역사란 역사가의 ‘이야기’로서 이야기는 역사적 자료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가는 자신의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를 통해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역사적 의미를 부가한다. 역사를 문학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냐는 많은 동업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내재하는 문학성을 인정할 경우 역사학이 더욱 비판적인 학문이 되리라는 그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작년 3월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근자에야 알게 되었다. 뒤늦게나마 추도의 옷깃을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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