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회승
정책경제 에디터
사유재산권이 인류 보편적 가치로 ‘격상’된 건 따지고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일이다. 프랑스 혁명을 거쳐 전세계가 이념 전쟁을 벌인 뒤, 사유재산권은 비로소 ‘자본주의 승리’의 상징이자 그 정수가 됐다. 우리가 천부인권이라 믿고 있는 생명권·자유권·평등권 등과 함께 기본권의 반열에 올랐다.
사유재산권의 원천인 ‘소유권’(로크나 홉스 같은 사상가들이 성찰한 것처럼)은 애초에 노동의 산물이었다. ‘내가 일해서 만들고 얻은 것은 내 것이며, 타인이 강제로 빼앗아선 안 된다’는 약속이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태어난 개개인에게 자연을 분배하는 규칙이었다.
사유재산권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는 건, 150여년 전 초기 자본주의 현상이다. ‘각각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문맥은,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각각의 이익’에서 ‘사회의 이익’으로 그 방점이 이동해왔다. 이른바 천민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가치를 수혈받으며 공공성을 높여온 역사다.
때문에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은 공공의 이익과 천부인권을 침해하는 사유재산권을 제한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재산권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23조)는 제헌 헌법의 정신을 현재의 경제민주화 조항(119조)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헌법 정신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아니, 정반대로 공익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사유재산권의 위력은 훨씬 세졌다.
‘재산의 자유권’은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헌법과 법률을 능멸하고 있다. 건물 이용료를 달라며 아이들 교육을 짓밟는 유치원, 재개발 지역 세입자는 아무 때나 내쫓으면 된다는 땅주인, 안전 비용을 빼돌려 직원들의 생명권을 위협하는 경영자. 이들에게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건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이들의 권리와 기본권이 충돌할 때 우리 국회와 법원은 서슴없이 돈의 편에 선다. 낡은 자본주의의 천박한 논리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 대기업 창업주들은 “내가 피땀을 흘려 일군 회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자손들도 마찬가지다. 대대손손 핏줄에게 기업을 물려주고, 자손들은 ‘아버지의 유산’이라며 경영권 승계를 당연시한다. 기업 가치는 수많은 노동의 산물이고 공익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는 상식은 이들에겐 잘 통하지 않는다. 경영과 소유가 분리되지 않는 국내 대기업의 독특한 생태계는 이런 독특한 정신세계의 산물이다.
조양호 회장이 어제 주주총회 결의로 대표이사직에서 쫓겨났다. 조 회장은 이사직은 물러나지만 경영권은 계속 행사하겠다고 즉각 불복했다. 재선임 불가를 결정한 주주들에겐 예상밖 반응일지 모르겠지만, 세대에 걸쳐 전수된 재벌 총수와 그 일가들의 정신세계에 비춰보면 당연한 수순일지 모른다. ‘기업은 나의 재산’이라는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재벌가의 상식이자 불문율을 그대로 따른 판단일 게다. ‘재산권을 인정해달라’며 개학 연기 투쟁을 벌인 사립유치원 원장들과 다를 바 없는 후안무치한 짓이다.
주주들이 조 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끌어내린 공식적인 사유는 횡령·배임 등으로 기업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주와 국민들의 분노는 이런 위법 행위보다 조 회장과 일가들이 보여준 참을 수 없는 천박함 때문일 게다. ‘왜 내 것을 빼앗느냐’는 숨길 수 없는 재벌가의 천박한 욕망에 대한 경고일 게다. 조 회장 일가가 자신들의 지분만큼 대주주로서 배당을 받아 돈벌이를 하는 것엔 이의를 달고 싶지 않다. 돈으로 먹고 사는 게 가능한 세상이니, 그렇다 치자. 다만, 그들의 몫은 딱 거기까지다.
‘조양호 퇴출’은 재벌가의 천박함에 우리 사회가 더는 관대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되어야 한다. 독점과 시장을 통제하는 수많은 제도를 두고도 잘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자본시장의 촛불혁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처럼, ‘사람의 얼굴을 한 경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작은 성취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