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서재정 칼럼] 대량살상무기와 새로운 길

등록 2019-03-24 18:19수정 2019-03-25 11:44

나는 북이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는 김정은과 트럼프의 ‘브로맨스’에만 기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70여년간 전쟁을 해온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씻고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많은 사람이 만나고 ‘사랑에 빠져야’ 한다.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하고 상호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정상화는 길고도 복잡한 이런 과정의 총합일 것이다.
서재정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03년 2월5일 유엔 총회에 세계의 눈과 귀가 쏠렸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이 이라크에 대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파월 장관은 사진과 그래픽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프레젠테이션으로 응답했다. “바그다드 외곽의 미사일부대가 생물무기를 담은 탄두와 로켓 발사대를 여러 장소에 지급하고 있습니다.” 인공위성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화살표들은 이 벙커들에 화학무기가 보관되고 있다는 확실한 흔적입니다.” 탄저균을 담을 수 있는 병 모형을 들고 보여주었고, 트럭 위에서 생물무기를 생산한다는 시설의 컴퓨터 영상을 보여주었다. 위험한 생화학무기를 생산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 정권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므로 제거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었다.

전세계에 이라크의 위험성을 ‘입증’한 지 한달 만에 미국의 침공이 시작됐다. 그러나 파월 장관이 있다고 주장한 생화학무기 프로그램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하노이에서 열린 정상회담이 결렬되고 북-미 관계가 난기류에 빠졌다. 미국이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폐기를 북에 요구했다는 뉴스를 들으며 이라크를 떠올렸다. 2002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 이후 유엔은 사찰단을 파견하여 이라크 곳곳을 사찰하고 있었다. 2002년 12월에는 이라크 정부가 1만2천쪽에 달하는 무기 목록을 유엔에 제출하고 사찰에 협력했다. 그러나 파월 국무장관은 이라크가 유엔 결의를 “중대하게 위반”했다고 허위로 주장해 이라크 침공의 빌미를 만들어준 것이다. 북은 이 가까운 과거를 이미 잊었을까.

트럼프 행정부가 북의 대량살상무기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1월31일 북-미 실무협상을 앞두고 한 연설이었다. 정상회담 뒤인 지난 11일에는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모든 대량살상무기 제거’가 센토사 공동성명의 2항인 한반도 평화체제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핵무기뿐만 아니라 생화학무기까지 한반도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그의 평화주의는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위험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북한이 비핵화 절차를 완료할 때까지는 제재를 해제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가 시작한 완전한 절차의 일환으로 생물과 화학무기의 제거”도 원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한다. 북이 대량살상무기를 완전하게 제거하기 전에 제재가 완화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대량살상무기의 비공개 또는 비약속(공개하기로 약속되지 않은) 프로그램에서 대량살상무기가 계속 개발되는 것을 직접 보조하는 방식으로 그에 따른 혜택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허용할 것”이다. 이 논리가 적용된다면 어떠한 제재 완화도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보조금이 될 수 있다.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완전 폐기가 제재 완화의 실질적인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애초 신뢰의 결핍이 문제였다. 그래서 센토사에서 상호신뢰 구축에 합의했다. 그런데 미국은 북을 신뢰할 수 없으니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먼저 폐기하라고 한다. 그 전에 북이 미국을 신뢰할 수 있는 조처는 취할 수 없다면 ‘상호신뢰’ 구축이라는 합의는 깨진다. 센토사 정상회담 이후 미국은 독자제재를 계속 추가했다. 이번에 독자제재를 추가하려다 취소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북이 상호신뢰 구축에 의구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우려한다고 해도 놀랍지는 않지 않은가.

해서 나는 북이 ‘새로운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북-미 관계의 정상화는 김정은과 트럼프의 ‘브로맨스’에만 기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70여년간 전쟁을 해온 두 나라가 적대관계를 씻고 관계를 정상화하려면 많은 사람이 만나고 ‘사랑에 빠져야’ 한다. 여러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이 이뤄져야 하고 상호이해가 깊어져야 한다. 정상화는 길고도 복잡한 이런 과정의 총합일 것이다.

할 일이 많다. 미국과 북은 상호신뢰를 더 악화시키는 요구와 행동을 중단해야 한다. 대신 신뢰를 쌓는 행동들을 취해야 한다. 미국은 판문점 공동선언과 평양 공동선언에 대한 지지를 공언하여 남북간의 평화 프로세스에 힘을 실어주고, 북은 영변 핵시설 동결 조처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동북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미국 의원단과 한국 의원단이 함께 방북하면 어떨까? 삼지연악단과 방탄소년단(BTS)의 미국 순회공연은? 김연아와 북의 피겨 페어 렴대옥·김주식 등으로 팀을 꾸려 미국을 순회할 수도 있겠다. 한국은 북·미와 함께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이대로면 식물 대통령, 자진사퇴, 탄핵뿐이다 1.

이대로면 식물 대통령, 자진사퇴, 탄핵뿐이다

검찰공화국 만든 ‘검찰발 보도’ [세상읽기] 2.

검찰공화국 만든 ‘검찰발 보도’ [세상읽기]

‘밥 먹듯 거짓말’ 윤 대통령 공천개입 의혹…특검밖에 답 없다 3.

‘밥 먹듯 거짓말’ 윤 대통령 공천개입 의혹…특검밖에 답 없다

[사설] 임기 절반도 안 돼 최저 지지율 19%, 이 상태로 국정운영 가능한가 4.

[사설] 임기 절반도 안 돼 최저 지지율 19%, 이 상태로 국정운영 가능한가

‘K컬처’라는 아이러니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5.

‘K컬처’라는 아이러니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