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일전에 경찰 대상 인권 교육을 한 적이 있다. 한창 이슈였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력 사건을 예시로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한분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권리 위에 잠든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사건은 안타깝지만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다면 경찰이 다 보호할 수 없으니 여성들이 먼저 변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반문했다. 잠잔다고요? 누가요? 그래서 성폭력 피해 신고를 했잖아요. 왜 신고한 건 권리의 행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뒤로도 여러곳에서 심심찮게 권리 위에 잠든 자는 보호받지 못하는 것이 법의 원리라며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더 단호하게 거부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한탄이 들렸다. 그들의 요지는 여성들이 성적자기결정권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다가 뒤늦게 침해당했다고 하소연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짐짓 오랜 격언을 빌려와 훈계와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오히려 권리 위에 잠든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명문을 남긴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의도를 반대로 해석하고, 엉터리로 쓰는 것이다. 법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권리를 위한 투쟁>을 쓴 예링이 말하고자 한 바는 이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고통을 느낀다. 이 고통은 인격적 고통이다. 자신의 인격을 지키는 것은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이런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비로소 정의롭고 평화로울 수 있다. 다시 말해,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가 침묵하지 않고 문제를 고발하고 싸우는 것, 불법 행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서 중요한 행위라는 것이다. 권리 위에 잠들지 말라는 의미는 권리 침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라는 경고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 길을 가다가 갑자기 칼에 찔린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신의 생명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왜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경계심을 잔뜩 세우고 더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탓하지도 않는다. 설사 살려달라고 크게 외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방어를 포기했다고 하지 않는다. 생명권은 존중받아야 하는 권리이고, 존중해야만 하는 권리라고 모두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식처럼 믿고 존중해야 할 기본적 권리엔 자기결정권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직장 상사가 강압적 분위기로 성적 접근을 할 때 뺨을 한대 갈기는 것만이 권리의 행사가 아니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상사는 직장 내 상하 위계가 작동하여 싫어도 쉽게 거절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자신보다 낮은 직급의 직원을 상대로 성적 접근을 할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권리가 행사되고 존중되는 환경이다.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타인의 권리 위에서 잠든 자들만이 법과 권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다. 성폭력을 저지르고 불법 영상을 촬영하고 유포하며, 성적 학대와 착취를 일삼고 이를 기반으로 돈과 권력을 나누고 불리며 자신들만의 안락한 일상생활을 즐긴다. 권리 위에 잠든 자들을 보호하지 않아야 한다면 바로 이런 경우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 것인가, 나는 못 본 척 눈을 감은 자가 될 것인가, 눈을 뜨고 기억하는 자가 될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예링은 인격을 훼손하는 굴욕적 불법에 대한 저항은 권리자 자신의 의무이자 공동체에 대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투쟁 없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스쿨 미투부터 권력형 부정부패에 얽힌 성폭력을 폭로하는 미투까지 모두 예링이 말한 저항이며, 적극적인 권리의 행사다. 지금 피해자들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 다시 묻자. 정녕 권리 위에서 잠든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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