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5일, 대한민국 외교부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방국 베네수엘라에 한해서는 “모든 권력이 국민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 헌법 제1조에 천명된 원칙마저 우습게 만들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요즘 아메리카 대륙의 한 나라를 둘러싼 소식들을 듣다 보면, 머릿속에서 실없는 공상이 날개를 편다. 가령 지금 프랑스 대통령은 어떤 마음일지 괜히 궁금해진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결선까지 치르며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도 프랑스 시민들은 “대통령 즉각 퇴진”을 외치며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주말마다 노란 조끼를 입고 계속 시위 중이다. 이런 처지에 놓인 마크롱 대통령이 아메리카 대륙의 이 나라를 보면 얼마나 분통이 터질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 나라는 겉으로는 민주주의 국가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주적 정당성과는 거리가 먼 독재자 아래서 신음한다. 이 독재자는 심지어 선거에서 한번도 승리해본 적이 없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2등밖에 하지 못했다. 다른 후보가 무려 30여만표를 더 받았다. 그런데도 2위 득표자가 권좌를 가로챘다. 현 대통령 지지자들이 그들의 상징색인 ‘빨간색’ 모자를 쓰고 선거인단을 협박이라도 한 모양이다. ‘민주주의’라며 어떻게 이런 권력 찬탈이 일어날 수 있는가? 놀랍게도 이 나라 선거제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다. 대통령을 직접 투표로 뽑지 않고 선거인단이 선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다 득표자도 아닌 선동가가 빨간 모자 무리의 위세를 내세워 대통령이라 자임해도 불법이 아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선거제도라니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날 법도 하다. 망한 지 30년도 안 된 소련 체제조차 마치 구석기 시대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무려 200여년 전 선거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전세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집권 과정만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나라 사람들은 폭력과 경제난에 신음하고 있다. 이를 보다 못한 세계 여러 나라가 싼값에 각종 물품을 안겨주었다. 비록 무역의 외양을 띠기는 했지만, 독재 정권 아래서 소득이 정체된 이 나라 서민들에게는 구호물자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무슨 심보인지 독재자는 이들 물자에 높은 관세를 물려 국내 반입을 가로막고 있다. 폭력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 나라에서는 매년 1만명 훨씬 넘는 사람이 총에 맞아 살해당한다. 하루 40여명꼴이다. 심지어는 12살 이하 어린이도 1년에 1천명 가까이 희생된다. 이 얼마나 지옥 같은 현실인가. 한데 통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총격 사망자의 50% 이상이 흑인 남성이다. 흑인들은 바로 현 대통령의 반대파다. 믿기 힘든 총기 사망자 수치는 실은 독재자가 반대파에 가하는 무자비한 폭력 탄압의 결과임에 틀림없다. 이쯤 되면 모든 민주국가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단호히 개입해야 한다. 무역 분쟁이 일어난 김에 경제 봉쇄를 단행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 재실시를 요구해야 한다. 선거가 다시 실시될 때까지 야당 소속인 하원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해야 한다. 여차하면 무력 개입까지 각오해야 한다. 독재자가 이미 선수를 쳐서 남쪽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니 북쪽 이웃나라에 연합군을 집결시키자. 역사상 최대의 ‘인도주의적’ 개입이니 작전명은 ‘충격과 공포’가 좋겠다. 당연히, 촛불 정권이 들어선 대한민국도 이 정의의 행렬에 동참해야 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공상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이 나라가 미국을 뜻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말이다. 물론 베네수엘라 현 정부도 문제가 있다. 현 정부는 전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주창한 ‘21세기 사회주의’를 제대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베네수엘라 국민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어떤 외국 정부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누군지 지명하거나 군대를 파견할 권리 따위는 없다. 지난 2월25일, 대한민국 외교부는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을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우방국 베네수엘라에 한해서는 “모든 권력이 국민이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나온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 헌법 제1조에 천명된 원칙마저 우습게 만들었다. 덩달아 이 원칙을 지키려고 2년 전 추운 거리에 나섰던 시민들까지 우스워지고 말았다. 2019년 2월25일은 참으로 슬픈 날이다. 베네수엘라가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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