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미국에는 볼테린 드 클레어라는 여성 무정부주의자가 있었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아버지는 계몽주의자 볼테르를 본떠 딸의 이름을 지었다. 빈궁한 형편에도 아버지는 딸이 더 좋은 교육을 받도록 수녀원에서 설립한 학교에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오히려 무신론을 포용하게 되었다. “무지와 미신이 타오르는 그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그는 거대한 강을 헤엄쳐 건넌 뒤 산길을 헤매다가 친지에게 발견되어 학교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강연과 기고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던 그는 궁극적으로 자유사상의 신문인 <진보시대>의 편집자가 되었다. 헤이마켓 사건은 그에게도 큰 충격이어서 무정부주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는 배심원이 판결하는 미국 사법체계가 갖고 있는 본질적 정의를 믿었지만, 이후로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암살의 위협도 겪었다. 습격한 자는 이전의 학생이었는데, 열병의 후유증으로 정신이 이상했다. 평소에도 병약했던 볼테린은 이 공격의 결과 귀와 목에 만성적인 질환을 달고 살게 되었음에도 즉각적으로 그 학생을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다. “질병을 앓은 두뇌에서 나온 행동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문명에 위배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형용사 없는 무정부주의”의 강력한 옹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골드만을 겨냥하여 재산권을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라고 공격하는 한편, 자신은 “개인에게 고유한 참된 재산권을 무효로 만들려는 모든 특권과 권위에 대한 전쟁”을 벌인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무정부주의자 이외의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것이다.” 세 살 손위의 볼테린과 골드만은 처음에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점차 지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었다. 볼테린은 ‘골드만을 옹호하며’라는 글을 썼고, 골드만의 잡지 <어머니 대지>에는 <볼테린 저작선>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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